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예진 Sep 18. 2024

54. 오해의 소지

민석이 한창 열을 올리며 닭볶음탕에 가비아 와인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있자 우혁이 나와서 허리에 손을 얹고 민석의 말을 끊었다.


“됐으니까 들어와서 밥이나 먹어라.”


말을 끝내지 못한 민석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와인병을 들고 주방을 향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겠다고 천하의 강우혁의 나를 위해 요리까지 하는 거야?”


민석은 자리에 앉기 전에 테이블에 세팅된 닭볶음탕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빨갛기는 한데 국물이 너무 흥건해서 닭볶음탕이라기보다는 닭을 넣고 끓인 고추장찌개 같은 모습이었다.


“이거 비주얼이?”


민석을 뒤따라온 서아도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우혁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맛을 봤는데 끝내줘. 국물 맛도 좋아.”

“그, 그런데 볶음탕 치고는 국물이 좀 많네요.”

“이게 포인트야. 찌개처럼 국물을 떠먹는 볶음탕이지. 국물 떡볶이에서 영감을 얻었어.”   

“아, 그렇구나.”


서아는 어정쩡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숟가락을 들어 국물 맛을 봤다. 청양 고추를 썰어 넣어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국물 맛이 정말 생각보다 괜찮았다. 


“어? 정말 맛있네?”

“그렇다니까. 보기보다 맛있어요. 자 그럼 민석이가 마리아주고 뭐고 닭볶음탕에 가비아 와인을 마셔야겠다니 따보자고.”


우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기가 해야 한다며 밥을 퍼주고 뼈를 발라놓을 접시까지 챙긴 뒤 와인을 땄다. 비록 그들 앞에 있는 개수대는 폭탄 맞은 것처럼 엉망이지만 테이블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옅은 초록빛을 띤 밀짚 같은 노란색의 가비아 와인을 한입 머금자 향긋한 꽃내음과 산뜻한 과일향이 입안에 퍼졌다. 세 사람은 동시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밥도 그럭저럭 잘했고 닭볶음탕은 훌륭해서 나무랄 데 없는 식사였다.


민석은 식사에 집중하지 못한 채 우혁이 언제 이야기를 꺼낼 것인지 눈치를 살폈다. 밥을 거의 다 먹고 나자 우혁이 진지한 목소리로 민석을 불렀다.


“민석아!”

“말해. 나는 이미 마음에 준비 단단히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준비가 필요한 이야기는 아닌데 내가 너무 뜸을 들인 것 같아서 미안하다. 서아랑 나…….”


우혁이 말을 잇지 못하고 쑥스러운 듯 와인을 마셨다. 글래머가 아니면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둥 별의별 소리를 다 해놨으니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혹시 서아 씨랑 너 광고 들어온 거 알고 그러는 거니? 광고 안 하겠다고?”

“광고 들어왔어?”

“그것도 아닌 모양이네? 줄 선 광고가 한두 개가 아니야. 그것 때문에 회의 한 번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뜸을 들이는 우혁을 보다 못한 서아가 끼어들었다.


“민석 씨, 제가 우혁 오빠를 좋아해요.”


놀란 우혁이 헉 소리를 내고 민석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서아를 바라보았다.


“저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오빠도 제가 좋은가 봐요. 그래서 우리 이왕 공식적인 연인이 된 거 진짜 사귀자 뭐 이렇게 됐어요.”


서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시원스럽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말하면 될 걸 가지고 뭘 그렇게 뜸을 들여요. 아, 진짜 기다리다 속 터져 죽을 뻔했잖아요.”

“대박, 너 이런 일을 어쩌면 그렇게 쉽게 말하니?”

“아니, 그럼 오빠처럼 뜸을 들이는 게 맞아요?”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세대 차이 확 느껴지네.”


“대표님도 이제 우리가 가짜라는 거 들킬까 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훨씬 좋으시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결혼까지 갈 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우혁 오빠랑 적당히 연애하고 파리로 떠날 거니까 오빠 커리어에 지장 줄까 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야, 은서아!”


우혁이 숟가락으로 접시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너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하냐? 사랑할 때는 당연히 헤어지지 않고 계속 사귈 생각으로 가는 거잖아. 그러다 보면 결혼도 할 수 있는 거고!”

“아닌데. 나는 우혁 씨랑 결혼 생각한 적 없는데.”


서아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 넣어둔 진한 초록색의 말차 케이크 프레지에를 꺼내며 말했다.


“결혼 같은 이야기 그만하고 달콤한 디저트나 드세요. 그런데 우리 장 대표님 아직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시네.”


서아와 우혁은 결혼 때문에 티격태격하느라 민석이 얼마나 놀랐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민석은 뭔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눈앞에 목도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야, 뭘 그렇게까지 놀래. 사람 민망하게.”


우혁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민석의 눈치를 살폈다. 


“아, 미안 그냥 좀 당황스러웠을 뿐이다.”


민석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가비아 병을 끌어다 자기 잔을 채웠다. 우혁이 채워주려 손을 내밀었지만 민석은 무시하고 가비아 병을 꽉 움켜쥐었다.


“서아 씨, 그런데 앞으로 계속 여기 계실 건가요?”

“네?”


서아는 민석의 엉뚱한 질문이 무슨 말인가 싶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럼 서아가 여기 있지 어디 있어?”


“두 사람이 진짜 연인이면서 같은 집에 살면 이제 동거나 다름없는 거네? 아니 정확히 동거라고 해야 하나.”


서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야, 장민석, 동거라니 너무 심하잖아.”


“나는 친구보다 소속사 사장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야.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로 이렇게 같은 집에 사는 거 자칫 문제가 되는 거 아닐까 싶어서. 문제 소지가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실제 연인이 아니라 눈 감았지만 앞으로는 좀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어쩌라고? 서아를 내보내라고?”


우혁이 정색을 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꼭 내보내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그게 뭔데?”


민석이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와인잔을 돌리며 침묵에 잠겨 있었다.


“당분간 내가 이 집에 들어와서 같이 사는 거야. 그럼 남들이 알아도 오해의 소지가 적지 않을까?”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오해의 소지는 무슨 오해의 소지!”


우혁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자 서아가 달래듯 우혁의 손을 잡고 민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장 대표님이 걱정하시는 게 뭔지 저도 알 것 같아요. 아무리 요즘 개방적인 세상이라고 하지만 우혁 씨가 저랑 같은 집에 둘만 사는 거 대중들에게 별로 좋아 보이지 않을 거예요. 장 대표님이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면 감사한 마음입니다.”


민석은 자기가 정말 우혁을 위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아니면 심술을 부리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서아가 감사하다니 그걸로 되었다 싶었다.    

이전 23화 53. 그만두는 게 아니고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