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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Sep 23. 2024

56. 두려운 마음이 들어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아에게 돈을 주기 위해서는 가사도우미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두 사람이 사귀는 마당에 서아를 가사도우미로 부려먹고 싶지 않았다. 도우미 일을 하지 말라고 하면 서아가 과연 돈을 받을 것인지?


“지금 무슨 고민하는지 다 알아. 나를 가사도우미 시키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돈은 주고 싶지?”


우혁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를 연발했다.


“내가 그걸 거절할 것도 아니까 망설이는 거지?”

“우리 서아 돗자리 깔고 나서야겠네.”

“됐고. 우리 공과 사는 분명히 하자고요. 나는 여전히 돈이 필요해. 돈 모아서 르 꼬르동 블루로 공부하러 가겠

다는 마음은 변함없어. 그러니까 이 집의 가사도우미는 계속하고 싶어. 오빠가 만약 나한테 일 시키는 게 너무 부담스럽다면 나는 나가야 할 것 같아.”


“그게 말이야. 달콤 출연료도 있고 앞으로 찍을 광고도 있으니까 네가 꼭 우리 집에서 일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잖아.”

“그, 그런가?”


서아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 한터라 당황스러웠다. 돈을 핑계로 확실하게 선을 긋고 싶었는데 그게 어렵다는 걸 깨닫자 뭔가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이 집에서 명분 없이 오빠랑 같이 사는 거 너무 이상하잖아. 다른 사람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나한테 명분을 만들어주고 싶어. 그게 내가 이 집에서 떳떳하게 지낼 수 있는 길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너한테 일 시키는 걸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라 이 말이야?”

“맞아.”


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혁은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뽀뽀 한 번 해주면 접수할게.”

“뭐야!”


서아가 우혁의 팔을 치며 눈이 휘게 웃었다. 우혁은 서아가 몸을 흔들며 불편해하거나 말거나 입술을 계속 내밀었다. 어디선가 키스해! 키스해!라고 성화대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서아는 입술을 내밀어 우혁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하고 재빨리 달아나 버렸다. 


열두 시 전에 출발해 회사 근처 유명한 맛집에서 목살 스테이크 덮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전에 집 청소를 좀 하고 싶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기로 닦았다. 물걸레 청소기가 닿지 못하는 곳은 청소포로 한 번 더 닦아주었다. 서아가 청소에 열을 올리자 우혁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따라다녔다.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따라다니며 방해를 해? 오빠는 운동한다고 했잖아?”


자꾸만 걸리적거리는 우혁이 신경 쓰이는 서아가 그를 밀어젖히며 한마디 했다. 


“운동은 언제든지 할 수 있고, 청소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 귀한 시간에 우리가 어째서? 왜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보내야 하는 거지?”

“데면데면?”


“나는 그동안 감추고 있던 너에 대한 마음을 봉인 해제 시키면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거든. 나도 내가 이럴 줄 정말 몰랐어. 지금 뭘 해도 집중이 안 돼. 나는 오직 너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고작 청소나 하겠다며 나를 봐주지 않으니 내가 이렇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잖아.”


서아가 들고 있던 밀대 걸레를 옆에 세워놓고 우혁의 뺨에 손을 올려놓았다. 우혁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닦는 중이었다. 우혁이 서아보다 한 계단 아래 서 있는 덕분에 두 사람의 눈높이가 맞았다.         


서아의 손이 우혁의 턱 선을 따라 입술 가까이 다가가자 우혁이 그 손을 끌어내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서아는 우혁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우혁 오빠.”


우혁은 서아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답했다.


“응.”

“난, 오빠가 그렇게까지 날 좋아해 주는 게 겁이 나. 활활 타는 나무는 그만큼 빨리 타버리잖아. 이러다 곧 오

빠가 싫증 내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나도 잘 모르겠어. 이렇게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감정과 맞닥뜨려본 게 처음이라. 아니라고도 그렇다고도 못하겠어.”


서아는 우혁의 품을 벗어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처, 처음이라고?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남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강우혁이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고?”


우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동안 받을 줄만 알았지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어. 내가 좋아하기 전에 나를 먼저 좋아하는 여자들뿐이었거든. 내가 좋다니까 그냥 나도 같이 어울리며 이런 게 좋아하는 건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지.”

“맙소사. 그럼 나는 그 여자들하고 뭐가 달라서 좋아해?”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냥 뭔가 너는 좀 다르고 낯선 느낌이었어. 그게 이런 마음으로 바뀔 줄은 나도 몰랐네.”

“첫사랑은 나 하나 만으로도 족한데.”


서아가 계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말했다. 


“나야 정신이 없어서 남자 사귈 여력이 없었지만 여자 사귈 만큼 사귀어본 오빠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설마 모든 여자들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닐 테고.”


우혁의 눈이 마구 흔들리며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아는 그런 우혁의 얼굴을 보고 재빨리 손을 모아 사과했다.


“다른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


서아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 옆에 앉은 우혁이 갑작스럽게 서아의 목덜미를 잡아끌어 입술을 덮었다. 화가 난 거친 입맞춤이었다. 부드러운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서아의 입술을 열고 밀어붙였다. 


서아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입에서 흐읍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혁의 손은 아주 나쁘게 서아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우혁의 움직임에서 화는 곧 사라지고 뜨거운 열기만 남아 그녀에게 전해졌다. 


“서아야.”


아주 낮고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났을 때보다 더 위험하게 들렸다. 서아는 눈을 감고 손을 뻗어 우혁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머리카락부터 발가락 끝까지 온몸의 세포가 들고 일어서 아우성을 치는 것만 같았다. 


계단 모서리에 등이 닿아 눌렸다. 하지만 그 통증이 통증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듯 판단이라는 게 서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우혁의 입술뿐이었다. 그의 입술을 놓치면 모든 걸 놓치게 될 것 같았다. 


서아는 남자를 좋아하게 되면 이렇게 그의 몸을 갖고 싶게 되는 건 줄 미처 몰랐다. 서아는 우혁의 몸에서 손을 떼어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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