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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Sep 27. 2024

58. 나도 반사

“내가 가지고 있는 걸 그렇게 함부로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쩌면 안 쓸 수도 있고 쓸 수도 있으니 앞으로는 신경 끄고 사세요.”


차현준은 발랄한 청년의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은 민성훈은 마른세수를 하며 치를 떨었다. 강우혁이 어쩌다 저런 쏘시오 패스의 과녁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현준의 소속사 사무실을 나온 민성훈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손을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장 대표에게 지금 이 일을 알려줘야 마땅할 것이다. 애초에 두 사람의 열애설을 제안한 것은 성훈 본인이었다. 강우혁이 특종 때문에 그런 제안을 한 거 아니냐고 빈정거릴 때 찔리는 게 없지 않았다. 


연예부 기자에게 강우혁과 가로수길 천사의 열애설은 앞으로 육 개월은 시달리지 않아도 될 만한 대어였다. 덕분에 괌으로 포상휴가도 다녀왔다. 그런데 그 열애설이 거짓이라는 걸 본인 입으로 직접 차현준에게 말했으니 이제 끝장인 것 같았다. 


장 대표에게 알려주고 대책을 마련할 시간을 줘야 하는 게 옳다. 그래서 장 대표의 전화번호를 찾아 들여다보기를 수차례 했다. 하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찾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찾아가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지 전화로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JK401 건물 앞에서 차를 빙빙 돌리며 고민하고 또 했다. 막상 건물 앞에 서자 다시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차현준이 언제 쓰게 될지 본인도 모르겠다고 했으니 어쩌면 안 쓸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주변을 헤매다 이를 악물고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그냥 가면 결국 나중에 오랫동안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주차시키고 키를 주머니에 챙기는 순간 백미러에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민성훈은 재빨리 허리를 낮춰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강우혁이 검은색 포르셰 자동차에서 내렸다. 가죽 재킷에 블랙 진을 입은 강우혁이 뚜벅뚜벅 걸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차 안에서는 예상대로 은서아가 내렸다. 차분해 보이는 베이지색 바지에 벽돌색 블라우스를 입고 조금 더 옅은 갈색 가방은 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우혁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차림새만큼이나 편안해 보이는 미소였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 지하주차장에서 꾸밈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은 다정해 보였다. 그 다정함의 끝을 보여주려고 작정한 듯 우혁이 은서아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볼에 뽀뽀했다.


예뻐 죽겠다는 표정,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빛, 당장 움켜쥐고 주머니에 넣어버리고 싶어 하는 남자의 마음, 그리고 더 거칠게 껴안고 싶어 욕망을 참는 손끝. 누가 봐도 강우혁은 은서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 우혁을 바라보는 은서아 또한 막 꽃송이가 터진 목련처럼 우아하게, 작약처럼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뭐야? 쟤들 이제 가짜가 아니라 진짜 연애를 하는 거야?”


민성훈은 감췄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숨을 몰아쉬었다. 뭔가 다 해결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더 엉킨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다. 만약 차현준이 문제를 일으키면 두 사람은 이제 어떤 식으로든지 헤쳐 나갈 방법이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장 대표님 안녕하세요?”


확인하기 위해 장 대표에게 전화를 건 민성훈의 목소리에 주저함이 사라졌다.  


-민 기자가 어쩐 일? 괌으로 포상 휴가 가서 초콜릿 하나 안 사 오더니.

“아이고 장 대표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가족들하고 같이 가서 정신없이 뒤치다꺼리만 하다 왔습니다.”

-흥, 나한테는 그것도 자랑이지.

“죄송합니다. 무조건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우혁 씨하고 은서아 씨 진짜로 사귀나 봐요?”

-어떻게 알았어요? 역시 눈치가 빠르네. 맞아요. 드라마도 같이 찍다 보면 사귀게 되는데 사귄다고 소문내고 붙어살다 보니 정들었겠지.

“그렇군요.”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거예요?

“아닙니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우혁 씨랑 서아 씨를 봤습니다. 보기 좋던데요.”

-그래요?


장 대표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참는 듯한 느낌이었다. 민성훈은 대충 다른 말로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차현준 이름이 입안에서 뱅글뱅글 돌았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다. 이제 진짜니까 가짜라는 말이 나와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생각하며 억지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애를 쓰다 보니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만 같았다.     




우혁이 손을 내밀자 서아가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다. 우혁의 손은 손가락이 길고 매끈하지만 푸른 정맥과 손등 뼈가 두드러져 남성적이다. 우혁은 자신의 손을 잡은 서아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단단하게 깎지를 켰다. 


마치 너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듯 서아의 손을 얽어맨 우혁은 다른 사람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아와 함께 걸었다. 


“공개 연애의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이런 거지.”


승강기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은강커플 사랑해요’라는 응원 목소리가 들렸다. 우혁은 그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 여자들의 입에서 캭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그 하트 너무 오그라들어.”


서아가 민망한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우혁이 심술을 부리듯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그녀의 눈앞에 내밀었다.   


“으, 으, 으.”


서아가 진저리를 치자 우혁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서아, 나도 예전에는 내가 이렇게까지 유치해질 수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어. 그런데 지금은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혁은 과장 없이 담담한 톤으로 진심을 이야기했다. 서아는 사무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우혁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말하면 나도 어쩔 수 없잖아.”


우혁이 입가를 들어 올리며 씩 웃자 서아가 한쪽 눈을 찡긋 감고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우혁의 가슴에 댔다. 


“나도 반사!”


두 사람은 세상 유치한 짓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키득거리고 웃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던 민석이 그런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천하의 강우혁이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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