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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Oct 07. 2024

62. 해돋이

“서아야, 일어나 해돋이 보러 가자.”


우혁이 잠든 서아의 어깨를 잡고 속삭였다.


“응? 지금 몇 시야?”

“다섯 시 삼십 분, 오늘 여섯 시 삼십 분에 일출이래.”


서아가 이불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전에는 그런 적 없던 작가들이 차현준이 오자 밤에 같이 술을 마시자고 졸라서 늦게까지 있었다. 자리를 뜨려고 하면 구 작가가 흥 깨진다며 매달렸다. 노래방까지 가서 구 작가와 차현준이 듀엣 곡을 부르는 사이 두 사람은 몰래 자리를 떴다.


“어제 술 많이 마셨는데 우리 카메라맨 일어났나?”

“그럼 벌써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어.”

“역시 프로네.”


서아가 바람막이를 입으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우혁도 이미 옷을 모두 갖춰 입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어?”


서아가 욕실로 들어가 바지를 갈아입고 나오며 묻자 우혁은 대답 대신 팔을 벌렸다. 서아는 그대로 우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 좋다. 이렇게 있으면 세상 무서울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아빠는 살아 계셨을 때도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한 번 집에 와도 아빠는 서아 차지가 되기는 어려웠다. 어렵사리 한 번 아빠 품에 안기면 그게 그렇게 좋았지만 곧 그녀의 팔을 잡아끄는 손이 있었다. 


‘누가 보면 서아만 딸이고 제인이는 딸도 아니라고 하겠어요.’


그 말을 하면서 서아를 잡아채는 새어머니의 거친 손길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혁의 품에 안겨 눈을 감으면 안겨 있어도 갈증 나던 아빠 품을 도로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마음이 으늑해지고 전생에서부터 찾아다니던 내 자리를 찾은 기분이 든다. 


이런 기분을 모두 표현하면 우혁이 부담 가질까 봐 내색하지 않는다. 우혁은 우혁이지 아빠 대신이 아니니까 말이다. 


서아의 몸을 감싸 안은 우혁이 그녀의 정수리에 뺨을 댔다. 


“나도 널 안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들어.”


서아는 우혁이 말하는 그런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 생각했다. 마치 그녀가 말하지 못한 마음을 우혁이 ‘그런 마음’이라는 말 안에 담아낸 것만 같았다. 


거실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나가야 해돋이를 놓치지 않을 거라는 채근이었다. 우혁이 심통 난 표정으로 거실을 힐긋거렸다. 서아는 까치발을 떼고 그런 우혁의 볼에 뽀뽀를 했다.


“이건 너무 잔혹한 일이야.”


우혁이 흐릿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거 하면 안 된다는 소리?”


우혁은 말없이 서아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서아만 아니었어도 차현준과 이런 가식적인 예능 따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아가 있어서 참는다. 서아 앞에서 시끄러운 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서아가 스트레스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집 밖으로 나가자 짭짤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다. 시월 아침의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쌀쌀해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우혁은 재빨리 서아를 끌어당겨 몸을 바싹 붙였다.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에 올라탔지만 출발을 하지 않는다. 카메라맨이 자꾸 밖을 흘끔거리는 것을 보고 우혁은 모르는 체 입을 다물었다. 여섯 시 전에 출발해야 하는 걸로 아는데 뜸을 들이고 있다. 제작팀 숙소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차현준과 그를 따라오는 카메라가 보였다.


어제 틀림없이 다섯 시 오십 분 까지는 출발해야 한다고 했지만 여섯 시가 넘어서야 나오는 차현준의 걸음에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차에 가까이 오자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다. 


“선배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우혁도 차현준의 미소에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와 접한 길을 따라 차가 달리는 사이 수평선에 조금씩 붉은 물이 들기 시작했다.


“오늘 날이 좋아서 해돋이 하기에 최고의 날이 될 것 같습니다.”

기사의 말에 뒷좌석에 구부린 채 잠들어 있던 조연출이 모자챙을 올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광고 연출하던 시절에 정동진에서 일출 찍으려고 오일이나 기다린 적이 있어요. 촬영 날짜만 잡으면 날이 흐려서 작정하고 기다렸더니 그렇게 오래 걸리더라고요. 오늘 운 되게 좋은데요.”

“역시 하늘도 가로수길 천사를 알아보는 모양인데요.”


차현준이 서아를 향해 윙크를 날린다. 우혁은 서아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고 시선을 돌렸다. 이십 분쯤 달리는 사이 하늘은 점점 주황빛으로 물들어갔다. 차에서 내려 일출 명소로 알려진 바닷가 암자를 향해 걸었다. 


커다란 바위가 절경을 이룬 바닷가에 서자마자 붉은 해가 수평선 아래쪽에서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주황색과 붉은색 물감을 팔레트에 섞어서 짜놓은 것만 같은 하늘이었다. 그 붉은 기운이 바다까지 번져 온통 세상이 다 불그스름했다. 


서아가 황홀한 듯 떠오르는 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해를 둘러싼 붉은 구름이 마치 용처럼 보였다. 여의주를 물고 금방이라도 치솟을 듯 넘실거리는 구름 사이로 해가 천천히 떠올랐다. 


“이렇게 아름다운 일출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매일 보는 해가 여기서는 이렇게 아름답게 뜨다니.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네.”


두 사람이 감탄을 하는 사이 차현준은 개인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해돋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풍경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우혁과 서아를 비췄다.


“오늘의 깜짝 손님으로 강우혁 선배님과 가로수길 천사 은서아 씨가 여기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이분들의 깜짝 손님이었는데 지금은 차현준 티브이를 찍는 중이니 두 분이 손님이 되겠습니다.”


카메라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차현준을 찍는다. 그리고 차현준은 아침 해를 향해 서 있는 우혁과 서아를 찍었다. 


우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카메라를 들이대는 차현준을 노려보았다. 용케도 지금까지 참아왔던 인내심의 한계가 온 것 같았다. 손을 내밀며 제지를 하려는 순간 따라온 조연출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눈빛으로 우혁을 바라보았다.


용인해 달라는 사인이다. 삼백만이 넘는다는 차현준 티브이 구독자를 이용해 프로그램 홍보를 하고 싶은 제작진의 꼼수인 모양이다. 우혁은 사납게 올라가던 눈썹을 끌어내리며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으로 차현준의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저희 구독자분들에게 인사 한 번 해주세요.”


우혁이 반가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행해 손을 흔들었다. 우혁은 차현준이 팬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칭찬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차현준은 그쯤에서 멈추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 일각에서는 강우혁과 은서아가 비즈니스 관계라는 소문이 있는데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혁은 당황하지 않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웃으며 서아를 찾았다. 서아는 바위 주변에서 가득한 황어 떼에 먹이를 주느라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서아가 먹이를 주자 황어가 온몸을 흔들며 모여들어 물을 튕겼다. 카메라는 튀어 오를 듯 소란스러운 황어의 움직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혁은 그런 서아 옆에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서아는 자연스럽게 우혁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손가락으로 황어를 가리켰다. 


우혁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까지 해명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해명이 듣고 싶으신 분들은 내가 서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자세히 보시면 정답을 아실 겁니다.”


카메라를 통해 우혁의 눈을 본 차현준은 강우혁이 메서드 연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두 사람이 진짜 사귀게 된 건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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