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21. 그럴 리가 없잖아

by 은예진

첨벙 소리와 함께 우혁의 몸이 욕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옷을 입은 채 욕조에 빠진 우혁은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서아를 끌어안았다. 핑크색 거품에 둘러싸인 두 사람은 솜사탕처럼 되어버렸다. 서아가 웃음을 터트리자 우혁도 같이 웃기 시작했다. 우혁이 움직이자 거품이 밖으로 흘러나가 주변이 온통 핑크색 거품 투성이가 되었다.


“첸이 집에 없어서 다행이다. 이 꼴을 봤으면 우리 당장 이 집에서 쫓겨난다.”


서아가 우혁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우혁은 그런 서아의 어깨를 잡아당겨 입술을 찾았다. 서아의 입에서 장미 향 섞인 비누거품 맛이 났다. 서아는 우혁의 셔츠 단추를 풀며 젖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젖은 셔츠와 바지가 욕조에 걸쳐지고 두 사람은 공평하게 되었다.


“이제 어쩌지?”


우혁이 뜨거운 눈길로 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은 타월로 거품을 닦아내고 내 방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우혁이 몸을 일으켜 준비해 둔 대형 타월을 집어 들었다. 온몸에 묻은 거품을 타월로 닦아낸 우혁이 밖으로 나가 서아를 들어 올렸다. 우혁은 서아가 갓난아기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열어 놓은 창으로 초여름의 열기가 섞인 바람이 들어왔다. 아직 견디기 어렵게 뜨겁지는 않지만 관능적인 기분이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우혁은 침대에 누워 자신을 바라보는 서아 곁에 몸을 누였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더 그리웠던 서로를 탐하며 두 사람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새벽이 돼서야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일어선 우혁이 속옷만 입은 채 짜장 라면을 끓였다. 거품과 벗어 놓은 옷으로 엉망이 된 테라스를 본 서아가 첸의 방문을 흘끔거렸다.


“첸은?”

“오늘은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내가 호텔 잡아줬어.”


서아는 짜장 라면을 먹다 말고 우혁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욕조를 준비할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이거지?”

“꼭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우리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설혹 네가 욕조에서 더 다가오지 못하게 해도 나는 괜찮았어.”

“정말?”


서아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우혁이 그녀의 코를 잡고 흔들었다.


“괜찮을 리가 없지.”

“뭐야!”


서아가 우혁의 손을 치며 노려보자 우혁은 일어서서 그녀의 뒤로 가 허리를 껴안았다. 말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창밖으로 어렴풋이 해가 뜨고 있었다. 일찍 일어난 새가 지지배배 거리며 아침을 깨운다. 서아는 길게 하품을 하며 이젠 진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날 밤은 시험 준비하느라 지난밤은 우혁의 품을 탐하느라 제대로 자지 못했다.




성적표를 받기 위해 학교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벽에 기대 울고 있는 독일에서 온 여학생이 보였다. 긴장하는 바람에 설탕 통을 엎는 것을 봤는데 감점 요소가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서아는 울고 있는 학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여학생은 서아의 팔을 잡고 한참을 훌쩍거렸다. 영어와 불어가 뒤섞인 말로 위로를 전하고 한 번 더 어깨를 두드려준 뒤 자리를 떴다.


똑똑똑


피에르 셰프의 방문을 두드리는 서아의 얼굴이 잔뜩 경직되었다. 떨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울고 있는 여학생을 보자 떨림이 더 심해졌다. 들어오라는 셰프의 목소리가 들린다. 서아는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고 내쉬며 문을 열었다.


피에르 셰프는 팔을 벌려 서아를 안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예상대로 서아 네가 일 등이야. 초급에서 이등을 하더니 중급에서는 일등이라니 이렇게 발전하는 네 모습이 정말 훌륭해.”


서아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피에르 셰프는 성적표를 주면서 고급반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받기 바란다고 말했다. 서아가 셰프 방을 나서자 먼저 와 있던 안나가 손에 성적표를 쥔 채 달려왔다.


“서아 몇 점?”


서아는 민망한 듯 성적표로 입을 가렸다 내리며 말했다.


“92점.”

“꺅! 서아, 일등이구나.”


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에 친구들을 불러 모으며 서아가 일등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혹시 우혁이 왔을까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오늘따라 우혁은 보이지 않았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자 안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서아, 고급반 시작하기 전에 열흘 동안 방학이잖아. 그때 뭐 해?”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그럼 우리 집에 놀러 올래?”

“포르투갈로?”


안나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겠는데.”

“그렇지!”


즉석에서 안나의 시골집을 방문하기로 결정해 버렸다. 포르투갈이라고 하면 리스본밖에 모르는 서아에게 알가르브(Algarve) 지방의 작은 마을인 사그레스(Sagres)라는 곳은 도대체 어떤 곳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미리 전화도 해주지 않고 집에 들어간 서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았다. 계단 청소를 하고 있던 우혁이 놀란 표정으로 청소도구를 집어던진 채 집으로 따라 들어왔다. 서아가 집세를 줄이느라 하던 계단 청소가 우혁이 오고 나서부터 그의 일이 되어버렸다.


“서아야?”


설마 서아가 낙제를 했나 싶은 우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서아를 불렀다. 서아는 그런 우혁을 놀리는 게 재미있어 점점 더 우거지상을 하며 식탁에 엎드렸다.


“왜 그래? 일등 못해서 그런 거야?”


웃느라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우혁이 보기에는 서아가 울음을 터트린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울지 마. 고급반에서 일등 하면 되지 뭐. 설마 낙제한 거는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