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의 고향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해안 도시였다. 주택가를 벗어나면 포도밭이 즐비했고 눈에 보이는 곳에는 온통 올리브나무 천지였다.
안나와 그녀의 가족들은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의 남동생인 페드로가 케이 팝 열혈 추종자에다 한류 대중문화 팬이라 우혁을 알아보고 흥분해서 어쩔 줄 몰랐다. 열일곱 살의 패드로는 한국어도 제법 할 줄 알아서 우혁과 서아를 놀라게 했다.
“내가 서아 너를 초대한 건 우리 패드로 영향이 좀 있었지. 패드로한테 한국 친구 데려온다고 했더니 좋아서 잠도 못 자더라고.”
서아와 우혁은 이럴 줄 알았으면 BTS 시디라도 챙겨 올 걸 그랬다고 하자 패드로는 이미 다 가지고 있다며 자랑했다.
푸른색 타일이 예쁘게 장식된 집으로 들어가자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 돼지고기 로스트비프, 통돼지 바비큐, 가자미 구이, 문어 병아리콩 샐러드 등 지중해의 신선한 올리브유가 듬뿍 들어간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떠들썩한 식사는 끝없이 이어졌다. 페드로는 더듬거리며 가족들과 두 사람 사이에서 통역을 했다. 통역 없이도 손짓 발짓 영어와 포르투갈어, 한국어가 뒤죽박죽 섞였고 다들 큰 의미 없는 말에도 웃음이 터졌다.
다음날은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대접하느라 동네가 소란스러웠다. 포르투갈의 시골 마을에도 생각보다 많은 케이팝 팬들이 있어서 한국에서 온 손님은 인기가 좋았다. 다들 술이며 먹을 걸 싸가지고 와 파티를 즐기고 싶어 했다.
우혁은 핸드폰 따위 가지고 다닐 이유가 없어 방전시킨 채 캠퍼밴에 놔두고 돌아다녔다. 이틀쯤 지나자 문득 핸드폰이 생각나 가져다 충전시켰다. 전원을 넣자마자 민석에게서 온 엄청난 부재중 전화 목록이 떴다. 처음에는 민석뿐이었지만 나중에는 별의별 사람들에게서 다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서아는 안나와 함께 동네 여자들과 밤 수영을 간다며 나갔다. 계곡에서 여자들끼리 하는 놀이라며 우혁은 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우혁은 서아가 먼저 문자를 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어 숨을 가다듬고 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민석은 다짜고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놀러 다니면 전화도 안 받는 거냐?
“차에 놔두고 방전시켜 버렸어. 포르투갈 시골 마음에서 핸드폰 볼 일이 있어야지.”
-아주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는구나?
“벌써 소문이 다 난 거야?”
-소문 정도가 아니다. 이러다 아주 강우혁 은서아 재결합을 기원하는 청원이라도 올라가겠다.
“그 정도야?”
우혁의 목소리가 시무룩하자 민석이 의외라는 듯 멈칫했다.
-뭐야? 그럼 너는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나야, 재결합하고 싶지. 하지만 서아가 원하는 일이 아니니까.”
-두 사람 소문처럼 잘 된 게 아니야? 여기저기서 둘이 같이 다니는 게 찍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서아가 거기까지래. 그다음은 없대. 한국 돌아가면 우리는 각자 자기 길을 가자고 하더라고.”
-흠.
민석이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서아 씨 이제 막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됐잖아. 그런 서아 씨가 너 때문에 구설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
“그렇지. 네 말이 맞아. 그런데 나는 어쩌지? 서아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나는 어쩌지?”
우혁은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감싸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민석이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자 멋쩍은 듯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너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데 괜히 신경질이다.”
-파리 숙소에 그대로는 못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외국 나가면 여기보다 지내기 수월했는데 요즘은 파리에서도 그런 게 전혀 없나 봐. 이쪽 매체들에서 사람을 산 건지 너희 숙소에 카메라든 사람들이 꽤 있다는데.
“젠장.”
우혁은 주먹을 움켜쥐고 힘을 잔뜩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울퉁불퉁한 돌장식이 있는 벽에 주먹을 내리치고 싶었다. 손님으로 머무르고 있는 집에서 주먹질을 하면 안나의 가족에게 큰 실례가 될 것 같아 참았다.
이번 여행이 둘이 같이 지낼 수 있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아가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 여기까지가 최선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왁자지껄한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혁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여자들이 마당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린 꼬마 소녀부터 나이 든 중년 여자까지 각양각색의 쾌활한 목소리가 여름밤의 뜨끈한 공기를 휘젓고 있었다.
나무 계단을 타닥타닥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젖은 머리를 늘어트린 서아가 어깨가 끈으로 된 원피스 하나만 입은 채 뛰어 들어왔다.
“너무 시원해서 가슴속까지 뻥 뚫린 것 같아.”
속옷을 입지 않은 서아의 상체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포르투갈의 태양은 서아의 흰 피부를 건강하게 만들어 놓았다. 젖은 머리를 훑어 내리며 동네 여자들과 얼마나 시원한 수영을 했는지 이야기하는 서아의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우혁은 서아를 끌어다 젖은 머리에 입술을 댔다. 머리에서 허브 향기가 났다. 서아는 우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계곡에서 여자들이 불렀다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 한 구절을 허밍으로 흥얼거렸다.
“어둠 컴컴하고 시원한 계곡에서 진짜 포르투갈 아줌마가 부르는 파두는 대박이던데. 분위기가 음산하면서도 슬프고 그러면서도 …….”
서아는 우혁의 입술 때문에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젖은 머리에 속옷을 입지 않고 원피스 하나만 걸친 채 뛰어 들어올 때부터 이미 그녀의 몸은 들떠 있었다. 우혁은 과격하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갑작스러운 우혁의 돌진에 놀란 서아의 입에서 ‘흡’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젖은 머리에서 물기가 흘러내려 등이 축축하게 젖었다. 우혁이 그녀의 젖은 등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조금 더 거칠게 몰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