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네 모습을 머릿속에 찍어두고 싶어. 내 머릿속에서 은서아하면 지금 이 모습을 떠올리고 싶어.”
“화장도 안 하고 머리는 엉망으로 젖어 있는 지금 모습을 기억하겠다고? 싫은데.”
“나한테는 지금 네 모습이 제일 예뻐.”
“너무 응큼한 눈빛인데"
서아가 손을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혁의 귀를 잡고 흔들었다. 우혁은 웃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숙여 서아의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방 안의 공기는 후끈달아오르고 우혁의 등에 땀이 흘러내렸다. 서아의 손의 우혁의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뜨거운 여름밤의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시원했지만 열기에 휩싸인 두 사람의 몸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땀에 젖은 두 사람은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방향 감각이 좋은 서아는 자신이 갔던 계곡을 어둠 속에서도 정확히 찾아냈다.
풀벌레 소리 들리는 계곡에 들어가자 바람의 온도가 집과는 전혀 달랐다. 서아는 원피스 자락을 훌렁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우혁도 재빨리 바지를 벗고 따라 들어갔다. 서아가 들어갈 때 그렇게 차가운 줄 몰랐다가 막상 몸에 물이 닿자 냉기에 놀란 우혁이 진저리를 쳤다. 서아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돌아서 물을 튕겼다. 달도 없는 그믐밤 열두 시가 넘은 시간의 계곡은 연인들의 놀이터였다.
두 사람은 배형을 하며 물에 둥둥 떠서 하늘을 올라다 보았다. 우혁의 손이 서아의 팔에 닿자 그는 서아를 일으켜 세워 안았다. 어둠 속에 껴안은 두 사람의 희끄무레한 모습은 애초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보였다.
삼박 사일 일정으로 온 사그레스 방문이 하루 더 연장되었다. 그럼에도 더 있으라고 매달리는 안나의 부모님과 패드로의 청을 간신히 물리치고 돌아섰다. 안나의 부모님은 포르투갈 어로 끊임없이 사랑하다는 말과 보고 싶을 거라는 말을 반복했다.
차가 출발하자 끝내 서아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안나의 가족들도 그곳 주민들의 환대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파리 근교까지 오자 우혁이 전원을 넣어둔 서아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서아야, 네가 편하게 공부하려면 이제 내가 떠나야 할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황한 서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열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서아는 우혁이 내미는 핸드폰을 받아 들고 민석을 비롯해 채영과 친구 몇몇이 보낸 문자를 읽었다. 포털을 열어 강우혁을 검색한 그녀는 자신의 집과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파리에 있어도 한국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네요.”
“요즘 세계 어디에 있어도 다 똑같지 뭐.”
좌석에 기대 눈을 감은 서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숨소리만 쌔근거렸다. 첸에게 전화를 해보자 지금은 집 근처에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꿈에서 깬 기분이야.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는 일 밖에 없는 건가.”
서아가 눈을 뜨고 우혁을 바라보았다.
“언제라도 네 마음 변하면 연락 줘. 기다리고 있을게.”
우혁의 말에 서아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우혁은 서아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었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나는 너를 이해해. 그러니까 마음에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이제는 그냥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알았지?”
“조르지도 않냐? 막 조르면서 너가 없으면 안 된다고 그냥 나랑 살자고 하면 내가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르잖아.”
서아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우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여 서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래볼까?”
서아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서아의 주먹이 우혁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우혁은 그런 서아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지금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그냥 고급반 공부 열심히 해. 당장 결정 내리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오빠는?”
서아가 빨개진 눈으로 우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네 곁에서 고급반 끝날 때까지 있고 싶었어. 하지만 이미 소문이 나 버렸으니 방해하지 말고 서울로 돌아가서 혼자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가기 전에 또 볼 수 있을까?”
우혁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여기서 작별하자. 짐은 첸을 통해서 돌려받을게. 다시 보면 나 못 떠나. 그럼 진짜 어려운 고급반 공부에 내가 큰 방해가 될 거야.”
결국 서아는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얼굴이 온통 젖어들게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그렇게 우는 서아를 달래지 못한 우혁은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기 바빴다.
“지금은 이렇게 울어도 공부 시작하면 내가 떠나 줘서 고마울 거야.”
“알아. 나도 그걸 알아서 더 눈물이 나는 거야. 이렇게 헤어지기 싫은데 그럼에도 내 공부, 내 꿈을 포기하기 싫으니까. 이게 뭔가 싶어서 더 속상한 거야.”
우리 서아 많이 컸구나. 이제 새엄마한테 사랑받고 싶어서 어렵게 번 돈 죄다 털어주고 신데렐라 노릇하던 그 은서아가 아니구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사랑하는 남자도 떠나보낼 수 있는 어른이 됐구나.
우혁은 서아의 눈물을 닦아주며 마음이 쓰리도록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되돌려 받지도 못할 사랑에 목을 매던 착해빠지기만 한 은서아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사실이 기특하고 또 기특했다.
“우리 서아 제대로 된 파티시에가 되겠구나.”
“그럼 당연하지. 르 꼬르동 블루 파티세리에서 일등 하는 게 쉬운 줄 아냐?”
서아가 코를 훌쩍거리며 말했다. 여전히 우혁의 손을 놓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우혁이 먼저 그 손을 떼어놓지 않으면 밤이라도 새워야 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