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혁은 떠나기 전에 첸에게 서아가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월세를 미리 다 내주고 갔다. 서아는 채영의 도움을 고맙게 받은 것처럼 우혁의 도움 또한 아무 말하지 않고 받기로 했다. 우혁과 미래를 약속할 수 없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그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서아 또한 우혁처럼 몸을 고단하게 하는 것이 지금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세 달 동안의 파티세리 고급반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서아는 그 어려운 과정에 온몸을 던졌다.
파티세리 고급반의 마지막 과정은 스튜던트 이벤트다. 초급반이나 중급반과 다르게 고급반의 마지막 시험은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실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학생들의 주변 지인들을 초대해 직접 이십여 가지의 디저트로 구성된 애프터 눈 티파티를 열었다.
고급반 시험 성적도 가장 우수했던 서아는 조장을 맡아 고군분투했다. 애프터 눈 티파티의 콘셉트를 정하고 디저트 메뉴를 결정하는 것부터 파티장 인테리어까지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루에 두세 시간씩 자며 티파티를 준비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되고 말았다.
서아의 클래스에서 정한 티파티 콘셉트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절)’였다. 벨 에포크란 1890년에서 1914년까지 유럽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화려함을 디저트로 표현하고자 한 서아의 시도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셰프에게 아름답기는커녕 구질구질하기 이를 데 없다는 구박을 받으며 준비했다. 샴페인과 홍차를 마련하고 갖가지 모양의 타르트와 케이크를 만들었다.
걱정과 다르게 파티는 대 성황이었고 서아는 무사히 우등 졸업을 하게 되었다.
“서아, 한국에 가서도 연락해야 해!”
안나가 그녀를 껴안으며 울먹거렸다. 우왕좌왕 초급반부터 예술의 경지를 체험한 고급반까지 겪으며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한 친구들이었다. 클래스 친구들은 서로를 껴안고 헤어질 줄을 몰랐다. 대부분의 졸업생들은 인턴십 과정을 신청했지만 서아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프랑스에서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디저트 전문점을 차리고 싶은 서아는 굳이 인턴과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이미 오 년 간 제과실 근무를 한 경험이 있으니 파티세리 세상은 익숙했다.
작별은 아쉬웠지만 새로운 출발이 눈앞에 있었다.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조용히 귀국했다. 보증금 오백에 월 삼십오만 원짜리 고시원을 얻어 들어갔다.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동안은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받았지만 앞으로는 오로지 그녀의 능력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청년창업 지원금으로 대출을 받아 부암동 깊숙한 골목 끝에 ‘스위트’라는 상호의 작은 디저트 카페를 차렸다.
세가 싼 곳을 찾느라 가장 후미진 골목 끝 집을 골랐다. 이런 곳에 디저트 카페가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할 위치였다. 그럼에도 인왕산 자락의 숲과 계곡의 너럭바위가 한데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 흥선대원군 별장인 석파정과 인접해 있어서 잘만 하면 꽤 괜찮을법한 장소였다.
인테리어를 할 때부터 각종 SNS에 관련 사진을 올리며 홍보했다. 홍보를 하면서도 자신이 가로수길 천사이자 강우혁의 전처라는 사실은 드러내지 않았다. 나중에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알려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서아가 직접 나서서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개업식도 따로 없이 조촐하게 시작했다. 개업 축하 선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문을 열자마자 꽃다발이 도착했다. 대부분 전국으로 배달하는 꽃바구니라는 것이 시들기 직전의 꽃을 꽂아서 보내는 처치 곤란 한 바구니가 대부분인데 이건 수준이 달랐다. 싱싱한 오렌지빛 장미와 풍성한 수국이 주는 화려함이 작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내는 사람이 없네요?”
꽃바구니를 받아 든 서아가 이리저리 살피자 배달원은 심드렁한 얼굴로 사인을 요구했다.
“저는 꽃집에서 받아오는 거라 아무것도 모릅니다. 꽃집에 연락해 보세요.”
“꽃집이 어디인지…….”
서아가 묻기도 전에 배달원은 쌩하니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붙잡아서 물어보려면 달려 나갈 수도 있었다. 본인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꽃집에 연락한다고 알려줄 리 없다는 생각에 떠나는 배달원을 내버려 두었다.
간결한 글씨로 ‘스위트의 개업을 축하합니다.’라는 한 줄 밖에 아무것도 없는 꽃바구니를 들여다보며 보낸 사람을 생각했다. 서아가 개업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지만 앞에 나서지 않겠다 마음먹은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아는 쇼윈도 밖에서 가장 잘 보이는 중앙에 꽃바구니를 올려놓았다. 보내준 사람이 혹시라도 들러본다면 당신의 마음을 이렇게 잘 받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꽃이 시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아가 장사를 시작하자마자 강우혁의 전처이자 가로수길 천사였던 은서아가 부암동에 디저트 카페를 차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더군다나 르 꼬르동 블루에서 우등으로 졸업한 그녀의 솜씨가 장난 아니라는 SNS 피드 덕분에 작은 카페는 연일 만원이었다.
“야, 은서아, 너 진짜 왔으면 왔다고 보고를 해야지 내가 인스타보고 너를 찾아와야겠니?”
채영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스위트로 들어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확 쏠렸다. 핑크빛 긴 머리에 오프숄더 블라우스와 짧은 반바지를 입은 윤채영은 주변에 있는 여자들을 죄다 기죽게 만들었다.
“언니, 채영 언니!”
서아가 채영의 손을 잡고 마구 뛰며 반가워했다.
“이렇게 반가울 거면 귀국하자마자 나를 찾아와야 할 거 아니야?”
“미안 언니, 이왕이면 빌린 돈을 들고 가서 만나고 싶었어. 나도 멋있게 등장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거든.”
“유치하기는.”
채영이 입을 비죽거리며 한심하다는 듯 서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카페 예쁘다. 손님도 많네.”
“응, 곧 빚 갚으러 가려고 했어.”
“그놈의 빚 타령은 하여간.”
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문밖을 흘끔거렸다.
“왜 언니?”
서아가 채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길 건너편에 익숙한 차가 눈에 뜨였다.
“내가 여기 올 거라고 했더니 굳이 데려다준다고 친절을 베푸네.”
“우혁 오빠?”
서아는 손님이 계산을 청하는데도 듣지 못하고 창밖을 응시하며 우혁의 이름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