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끝나고 술 한잔하자고 하는데 선배님도 참석하실 거지요?”
가끔 지나치게 스킨십을 좋아하고 친근하게 구는 여배우들이 있다. 관심받기 좋아하는 천생 연예인인 그녀들이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렇게 팔짱을 끼고 대들면 불편해진다.
예전 같았으면 팔부터 빼고 봤을 텐데 이번에는 가만히 있었다. 팔을 빼려는 순간 채영의 말이 떠올랐다. 서아에게 기회를 줘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다 보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도 날 것이다. 그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니 슬쩍 흘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연하지. 다들 고생하는데 좋은 데서 마시자. 내가 사줄게.”
“정말요?”
까칠하기로 소문난 강우혁이 선뜻 술자리를 수락하자 여배우 지민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와, 선배님 뒤풀이 별로 안 좋아하신다고 해서 다들 기대 안 했는데 완전 좋아요.”
일 차는 갈비를 먹고 이 차는 노래방을 갔다. 내일 촬영이 없다는 핑계로 다들 먹고 죽을 기세였다. 노래방에서 두 시간을 놀고 다시 해장국을 먹으러 가서 또 술을 마셨다. 이제 사람이 술을 먹는 건지 술이 사람을 먹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 어울리자 대여섯 명의 고정 멤버가 생겼다. 단톡방을 만들고 누군가 오늘은 돼지 껍데기 집에서 모이자고 하면 다들 콜을 외쳤다. 동료 연예인들과 잘 어울리지 않기로 소문나 있던 우혁이었지만 어울려보니 재미도 없지 않았다.
스캔들이 날 때는 쉽게 나더니 막상 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자 너무 조용했다. 거리낌 없는 행동이 도리어 의심을 사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다 보니 오늘은 다들 일 차를 끝으로 돌아가고 지민과 둘이 남았다. 지민은 오늘은 둘만 있으니 위스키를 마시자며 우혁을 잡아끌었다.
재즈 선율이 나지막이 깔리는 꽤나 고급스러운 위스키 바였다.
“매번 시끌벅적한 술집만 다니더니 둘만 남으니까 분위기 있는 곳으로 오네?”
우혁이 바에 앉아 지민을 지그시 바라보며 웃었다.
“이런 날 엄청 기다렸어요. 선배님.”
지민이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입을 열었다. 우혁이 왜냐고 묻기를 기다리던 지민은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하는 수없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선배님 이혼했어도 아직 전부인 사랑하고 계신다는 거 저도 알아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는구나.”
“그래도 제가 선배님 좋아하는 건 상관없지요? 짝사랑은 괜찮은 거지요?”
지민의 말에 우혁이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지민아, 하지 마라. 이러면 내가 나쁜 놈이 된다.”
“나쁜 놈이라면?”
“네 말대로 나는 아직 서아 밖에 몰라. 세상에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 나한테는 오직 서아만 여자야. 그런데 네가 나한테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널 이용하고 싶어 져.”
“저기 사실은……. 채영이 언니한테 들었어요.”
“뭐? 그럼 알고도 네가 나랑 스캔들이 나고 싶어서 이렇게 접근한 거야?”
지민이 격하게 고개를 흔들며 그도 모자라 손까지 흔들었다.
“아니에요. 언니는 마음 있으면 스캔들 한 번 흘려보라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럴 마음은 절대 없었어요.”
“그럼 다행이고.”
“이렇게 친하게 지내다 보면 혹시 선배님이랑 오빠 동생 하는 사이로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선배님 곁에서 보니까 그럴 가능성이 너무 안 보여서 그냥 고백하는 거예요.”
우혁은 아직도 볼에서 손을 떼지 못한 지민이 귀여워 머리에 손을 올려놓으려다 멈췄다. 서아에게 하던 버릇이 있어서 무심코 손이 올라갔다. 우혁이 머리를 자주 쓰다듬자 서아도 처음에는 가만히 있었지만 나중에는 이러는 거 싫다고 화를 냈다.
그의 손이 머리를 흐트러트리면 미간을 찡그리던 서아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혁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민이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을 짓는다.
“어,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
위스키를 많이 마신 건 아니었다. 음악이 좋았고 분위기도 꽤 괜찮았다. 다들 자기 술 마시기에 바쁜지 두 사람에게 큰 관심을 기울지도 않았다.
너무 취하기 전에 끝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민도 많이 취한 것은 아니었다. 우혁이 계산을 하고 출입문에 손을 대자 지민이 재빨리 다가와 우혁의 팔을 잡았다. 출입문을 열자 찬바람이 쌩하니 불어닥쳤다. 놀란 지민이 우혁의 옆에 바싹 달라붙었다.
“생각보다 춥네요.”
“그러게.”
우혁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웅크리자 지민이 재빨리 그의 팔을 잡고 몸을 기울였다. 누가 보면 마치 두 사람이 키스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뭐야?”
우혁이 멈춰 서서 지민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더욱 가까이 몸을 밀착시켰다.
“방금 전에 데일리 뉴스 카메라를 봤어요.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우리 영화를 위해 스캔들 한 번 내주지요 뭐.”
“굳이 이렇게까지.”
“이왕이면 선배님 전 부인이 질투하게 센 장면 하나 만들까요?”
“됐어. 그렇게까지는 싫다.”
“헤헤, 농담이에요.”
지민은 한쪽 눈을 찡긋 거리며 우혁의 팔을 잡은 채 걸음을 서둘렀다. 지민의 매니저가 그녀 앞에 차를 대다 다정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팀장님은 내가 소원 성취했는지 알겠네요.”
지민이 우혁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더니 재빨리 타에 올라타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귀엽고 다정한 모습에 우혁은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정확하게 지민이 의도한 장면이 데일리 뉴스 연예란에 실리면서 열애설이 떴다. 서아와 재결합을 바라던 대중들은 우혁이 같이 영화를 찍고 있는 상대 여배우와 사진이 찍히자 갑론을박하며 자기들끼리 싸웠다.
팬들은 우혁이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연애를 할 수 있는 건데 왜 난리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은서아랑 파리에서 지낸 게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열애설이냐고 이래서 남자는 믿을 수 없다고 섭섭해했다.
JK401 측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해명이 없었다. 헛소문이면 강력하게 아니라고 하거나 감추고 싶으면 친한 선후배 사이라고 할 텐데 이도 저도 없이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지민의 소속사에서는 짤막하게 강우혁은 영화에서 연기 도움을 많이 받는 상대 배우일 뿐이라고 했다.
열애설이 터지자 지민과 우혁 그리고 다른 배우들이 같이 어울려 다니던 사진이 여기저기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우혁은 엄지손톱을 이로 튕기며 서아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기다렸다.
“혹시 서아한테 연락 온 거 없냐?”
-없어, 없으니까 좀 기다려. 아직 기다려야 할 때야. 벌써부터 이렇게 초조하게 굴면 어쩌려고?”
채영은 우혁의 잦은 전화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쌤통이라는 듯 혀를 내밀었다. 우혁이 초조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고소해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카페 근처에 가서 한 번 살펴볼까?”
-산통 깨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알았다는 우혁의 목소리가 어지간히도 초조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