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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국민 역적

by 은예진

서아가 계속 어깨만 떨고 있자 우혁이 보다 못해서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너는 최선을 다했어. 내가 알아. 그러니까 생각보다 못한 결과가 나왔어도 열심히 한 과정을 생각하자.”


서아는 엎드린 채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성적표를 꺼내 우혁에게 내밀었다. 성적표를 받아 든 우혁이 처음에는 제대로 볼 줄 몰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92점과 최우수라는 말을 확인하고 소리를 질렀다.


“은서아! 너 이 자식!”


서아가 고개를 번쩍 들고 깔깔거리고 웃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크자 첸이 방문을 열고 여기 두 사람만 사는 거 아니라고 조용히 좀 하라며 투덜거렸다. 우혁은 그런 첸을 향해 더 큰 목소리로 소리 높여 자랑했다.


“우리 서아가 르 꼬르동 블루 파티세리 중급반을 일등으로 졸업했어. 너라면 조용할 수 있겠니?”


그 말에 첸이 뛰어나와 서아를 끌어안았다.


“서아, 축하해.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한바탕 축하 인사가 끝나자 서아가 우혁에게 안나의 제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포르투갈의 시골 마을 사그레스에서의 며칠이라는 말에 우혁의 눈이 반짝거렸다.


여행 계획을 들은 우혁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폭스바겐 캠퍼밴을 렌트한 거였다. 서아는 말로만 듣던 캠핑카를 타게 된 것이 신기해서 스토브에 불을 켜보고 싱크대에 수도꼭지를 틀어보았다. 캠퍼 밴의 정말 근사한 기능은 우혁이 말해주지 않아 몰랐다.


캠퍼를 타고 파리에서 출발 오를레앙(Orleans)을 거쳐 툴루주(Toulouse)로 들어갔다. 첫날 한적한 숲 속에 차를 세우고 캠핑을 시작한 서아는 우혁이 차의 천장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아이처럼 신이 나 손뼉을 쳤다. 루프탑 텐트 덕분에 차 문을 닫아도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와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침대를 펼쳐놓고 누운 서아는 어둠에 묻힌 숲 속에서 들리는 부엉이 소리를 들으며 우혁의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좋다. 평생 이렇게 살면 좋겠다.”

“이렇게 살지 못할 건 뭐야.”


서아가 고개를 들고 우혁을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과연 그럴까?”


갑자기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난 서아가 머리를 묶으며 창에 턱을 걸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릿어릿 불빛이 보이기는 하지만 어둠에 묻힌 숲 속은 약간 으스스했다. 숲 속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서아가 고개를 돌리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만이야. 여기서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행복한 뒤에 그걸로 끝냈으면 좋겠어.”


우혁은 놀라지 않았다. 서아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능할까?”

“가능하기 쉽지 않겠지. 하지만 오빠는 오래 쉬었으니 바쁠 거고 나도 새롭게 시작해야 하니 정신이 없을 거니까 가능할 거라고 봐.”

“꼭 그래야 하는 거니?”

“내가 오빠랑 다시 시작하면 나는 은서아가 아니라 강우혁의 아내로 살아야 할 거야. 오빠 그늘에 가려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는 파티시에 은서아로 내 꿈을 펼치며 살고 싶어.”

“나는 네 꿈에 방해되는 존재인 거니?”


서아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오빠는 내 꿈을 싹 틔워 준 사람이야. 오빠가 아니었으면 어림없었지. 그런데 오빠 품에 들어가 보니까 안 되겠더라고. 싹튼 꿈은 자라야 하는데 오빠 그늘이 너무 커서 자꾸 시들어.”

“지금처럼 내가 네 꿈을 위해 살면 안 될까?”

“흐흥.”


서아는 말 대신 그냥 웃었다. 무릎걸음으로 우혁에게 다가온 서아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럼 난 국민 역적이 되겠군.”


우혁은 서아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며 생각했다.


예전의 은서아가 아니구나. 너는 이제 어엿하게 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어른이 되었구나. 나는 어떤 말로도 너를 붙잡을 명분이 없구나.


“너는 이번 시험에 떨어져서 유급을 했어야 했어. 그래서 중급 과정 한 번 더 하고 고급 과정은 한 세 번쯤 해서 졸업을 최대한 늦춰야 했어.”


우혁의 말에 서아가 키득거리고 웃었다.


“이래서 사랑하지만 같이 할 수 없는 커플들이 있는 거구나 싶어.”

“아니, 더 사랑하는 사람이 양보하면 돼.”


서아가 우혁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결국 양보한 사람이 불행해지고 관계는 엉망이 돼버릴걸.”

“그런 얘기 정말 싫다.”


결국 우혁은 회피하듯 눈을 감고 서아의 어깨를 껴안았다. 서아는 우혁의 허리를 안고 매트리스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싶어. 지금은 오빠를 사랑하고 싶어.”

“그래 서아야 우리 사랑하자. 사랑해.”





파리에서 우혁과 서아가 같이 다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SNS에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진뿐만 아니라 목격담도 올라오면서 두 사람이 파리에서 동거 중이라는 추측성 기사가 떴다. 발 빠른 기자 몇몇이 첸의 집으로 찾아갔지만 첸은 짜증 내며 두 사람은 지금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이 집에 살고 있다는 건 확실한 건가요?”


순간 첸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우혁은 첸에게 자신이 이 집에 살고 있는 게 소문나지 않게 해 달라고 했었는데 엉겁결에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러니까…….”


다음날 한국의 포털에는 우혁과 서아가 살고 있는 집의 사진과 그동안 사람들에게 찍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사진이 넘쳐났다.


<강우혁 집행자 시즌 투 끝나고 파리에서 이혼한 전처 은서아와 동거 중.>


댓글은 온통 두 사람의 재결합을 응원하는 글뿐이었다. 온 국민이 두 사람의 재결합을 바라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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