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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경이로운 우주로 온 너

by 은예진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이 우주에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라는 말을 했다.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으레 칼 세이건의 말을 떠올리며 어딘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그건 상상의 영역일 뿐 아직 우리는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다. 즉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는 곳은 지구뿐이다. 무한대의 우주를 거론하지 않아도 태양계만으로도 충분히 넓다.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는 데 걸린 시간이 36년이다. 보이저 2호는 41년이 걸렸고 사실상 우리는 그 궤도에서 생명체의 존재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오후 8시 30분, 나는 운동화를 신고 걷기를 위해 문을 나선다. 중년기에 걷기만이 능사가 아니고 근육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안 하는 것보다는 규칙적인 걷기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밤길을 걷는다. 여름에는 이 시간에 집을 나서면 해가 지면서 남긴 빛이 어스름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요즘 같은 겨울엔 한밤중이고 추운 날이면 유난히 더 별빛이 또렷하고 촘촘하다. 꽤 오랜 기간 밤길을 걸으며 별자리 앱을 통해 태양계의 행성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개밥 줄 시간에 떠서 개밥바라기라는 별명이 붙은 금성은 서쪽하늘에서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인 컬리넌처럼 반짝 거린다. 이삼 년에 한 번씩 시야에 들어오는 화성은 그 붉은색이 유난히 도드라지며 금성의 밝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른 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목성이 달 부근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행성들을 보며 걷노라면 내가 디디고 선 이 특별한 행성 지구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이 옮아간다. 넓은 태양계 중에서도 우연이란 우연은 모두 모아 물을 만들어낸 지구는 결국 필연적으로 생명을 잉태하게 되고 원생생물로 시작된 우리는 현재의 모습까지 왔다. 어두운 밤하늘은 광활하며 멀리서 오랜 시간 달려온 별빛은 내 머리 위에서 반짝인다. 내가 나로 여기에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연과 필연의 역사가 필요했는지 생각하면 그 기적에 아득한 현기증이 느껴진다.


아기가 우리 곁에 왔을 때 나는 우주가 내게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넓은 우주에서 아직까지는 유일한 생명체가 있다고(?) 여겨지는 지구에 그 긴 역사를 몸에 담고 태어나 울고 있는 아기는 우주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건 아기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도 너도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성취한 게 적고 별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면 어떤가. 우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주적으로 경이로운 존재인 것을. 어쩌면 할머니가 된 감격에 너무 많이 간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들으면 호들갑의 수준이 우주적이라고 흉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밤하늘을 보며 별빛을 자주 마주치다 보면 생각이 우주까지 날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초음파 사진 속에 작은 점이었던 아기는 우주의 역사를 압축한 것처럼 빠르게 자라 온전한 팔다리와 이목구비를 가지고 세상에 나왔다. 막상 세상에 나왔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자리에 누운 채 우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게 다였다. 그런 아기가 6개월이 지나자 온 집안을 기어 다니며 두드리고 맛보고 집어던진다. 이제 아기는 집안에서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돌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의젓하게 의자에 앉아 미음과 오트밀, 소고기와 애호박을 갈아 만든 예쁜 이유식을 한 그릇 뚝딱 먹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아기를 최대한 먼 곳에 데려다 놓은 부모가 양쪽에서 아기를 향해 이름을 부른다. 쏜살같이 달려온 아기는 갈림길에서 멈칫한다. 잠시 고민하던 아기가 엄마 쪽을 향해 고개를 흘깃 돌렸다. 그리고 재빨리 방향을 바꿔 아빠에게 향한다. 아기는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선택할 수 있으며 자기가 선택한 아빠에게 달려갈 수 있다. 잠들지 못하고 투정을 부리던 아기는 아빠가 배를 만져주자 팔다리를 파닥이며 웃는다. 잠을 자는 것보다는 아빠랑 장난이 치고 싶은지 아빠가 손만 들어도 응애응애 웃는다. 웃음이 아빠의 손길을 잡아 끈다. 그렇게 육 개월 아기의 밤이 깊어간다.


이 아기도 좀 더 자라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할 거고 지금은 뭐든지 다 해주는 엄마 아빠가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칠 것이다. 때로는 두려움에 떨 것이고 때로는 좌절할 것이다. 그 좌절 때문에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이면 우리 아기가 이 말을 되새겼으면 좋겠다.


'너는 경이로운 우주를 품고 태어난 존재란다. 네가 무엇이 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거란다. 그러니 아가야, 네가 기적임을 잊지 말아라.'


우리 아기를 사랑하면서 나는 내가 지금껏 누군가를 사랑하는 동안 온전히 내 마음을 모두 열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을 하면서도 항상 보이지 않는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의심했다. 그런데 손녀에 대한 사랑은 어떤 자기 검열도 없이 자유롭다. 나는 그냥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참 신비로워서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나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기에게 네가 경이로운 우주를 품고 태어났음을 알려주면서 나 또한 그런 존재임을 인식한다. 사랑은 그렇게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온다. 아기가 돌려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돌려받는다. 사랑이 그런 거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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