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려간다는 딸네에게 인사하기 위해 안방에 고개를 들이미니 어둑한 방안, 아빠의 다리 위에 아기가 앉아 있다. 나는 ‘oo이 미워, 밤새 잠을 못 자서 엄마, 아빠 힘들잖아.’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아기가 담쏙 내 품에 안긴다. 아기는 내 옷에 달린 반짝이는 단추가 맘에 드는지 조몰락거린다. 그 조그만 손으로 달랑거리는 단추를 만지는데 그 손길이 마치 내 심장을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기와 작별 인사를 하고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길,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러더니 운전석 앞에 앉았는데 어이없게도 눈물이 났다.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당황스럽다. 본디 건조한 내 성격을 잘 아는 가족들이 들으면 믿지 못할 일이다. 딸을 기숙사형 고등학교에 보내고 돌아서던 날 내가 울며 집에 갔다는 말을 들을 때면 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기숙사에 들여보내놓고 혼자 버스 정류장에 서서 펑펑 울었다는 건 그래서 전설일 뿐이다. 딸이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는 그렇게 딸의 유년 시절과 작별하고 이후로는 내 곁에 있을 시간이 거의 없다는 걸 알기에 어쩌면 통과의례 같은 눈물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눈물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부부가 같이 육아 휴직을 하고 있으니 큰맘 먹고 6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4시간이 넘는 우리 집에 오기로 했다. 아기가 오기 전날 자기감정 표현에 적극적인 남편은 ‘설렌다’라고 하며 아기를 기다렸다. 카시트 안에서 세 시간이 넘어서자 짜증을 부렸다는 아기는 집에 들어오자 낯선 듯 두리번거렸다. 내가 품에 안자 낯가림할 때가 충분히 된 아기가 울음을 터트린다. 낯선 집에 낯선 할머니 품에 안긴 아기는 울음으로 자기감정을 표현한다. 나는 아기를 달래느라 안고 서서 집안을 돌았다. 이박삼일 일정으로 할머니 집에 온 아기의 짐이 많아 늦게 들어온 아빠를 보는 순간 아기의 울음은 세 곱절쯤 커졌다.
‘아빠가 있었던 거야? 그런데도 나를 모르는 사람 품에 안겨놨어?’ 아기는 마치 이렇게 항의하는 듯했다. 얼굴이 붉어지도록 울음이 커질 즈음 짐 정리도 하지 못한 아빠가 아기를 안아 들었다. 울음을 뚝 그친 아기의 눈썹 끝에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할머니와 한 번 인사로 울고, 할아버지와 또 한 번 인사로 운 아기는 히끗거리며 울음을 멈췄고 제법 빠르게 적응했다. 적응을 마친 아기는 집안 탐색을 시작했다. 팔 힘을 이용한 낮은 포복으로 그렇게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먼저 기둥이란 기둥은 모두 맛봐야 하니 식탁 의자도 만져보고 소파 테이블을 쥔 채 놓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수건 건조대까지 밀어버리고 나자 싱크대에서 주방일을 하는 내가 보인 모양이다.
아기가 낮은 포복으로 기어 다니는 것을 보면 영화 ‘끝까지 간다’에서 이선균이 환풍기 안에 들여보냈던 군인 인형이 떠오른다. 우리 아기 어깨에도 총 한 자루 올려놓으면 딱 어울릴 것만 같은 자세다. 아기는 엄마를 뒤에 달고 주방으로 달려와 내 다리 곁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싱크대에서 일을 하다 말고 아기에게 말을 시키자 배시시 웃는다. 그 웃음에 할머니 마음 녹아내린다.
예민하지 않아서 집에서 먹는 분유와 맛이 조금 다른 휴대용 분유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먹고 바닥에 내려놓으면 장난감 가지고 혼자서도 잘 노는 아기가 제일 심하게 가리는 것이 잠자리다. 지난번 전주에서 만났을 때도 숙소에서 밤잠을 못 이루던 아기는 이틀 동안 설 잠을 자며
여러 번 깨서 울었다. 네 시간을 운전해서 우리 집에 온 아기 엄마, 아빠는 밤새도록 울어대는 아기 때문에 잠을 설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기야 어른인 나도 집 나가면 잠을 설치는 날이 많은데 경험치가 없는 백지상태의 아기야 오죽할까 싶다.
잠투정이 심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제법 의젓한 육 개월 아기였다. 낮에 잠깐 아기를 보러 온 내 동생에게 환한 웃음을 보여주며 손님 접대를 했다. 아기의 팔다리를 만져본 동생이 단단한 아기의 몸이 건강해 보인다며 좋아했다. 딸은 이모에게 아기가 지금까지 병치레 없이 예방 주사를 맞고도 열이 나거나 하지 않았다고 자랑한다. 동생은 아기가 미스코리아 감은 아니지만, 체력 좋은 진취적인 여성의 자질이 보인다며 좋아했다.
오후에 아기의 힘을 빼놔야 잠을 잔다며 부부가 거실 양 끝에 앉아 아기를 불러대는 모습을 보니 정말 체력 소녀의 기질이 보였다. 아기는 멋쟁이 토마토 노래가 나오는 딸랑이를 든 엄마에게 기어갔다가 자기를 부르는 아빠를 향해 또 기어가고 뒤에서 엄마가 부르면 돌고래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그걸 지치지 않고 반복하는 아기의 힘에 나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법한 운동 잘하는 소녀가 햇살 아래 멋지게 공을 날리는 모습 또는 땀을 흘리며 달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모습 속에는 승부 욕이 남달랐던 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방울이 같이 떠오른다.
아기는 무사히 집에 돌아갔고 평화로운 밤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눈에는 자꾸만 그 통통한 손이며 웃을 때 팔자로 내려가는 재미있는 눈썹이며 기저귀 때문에 불룩한 엉덩이가 아른거린다. 태어나서 처음 누군가를 보내며 눈물을 흘려봤다. 손녀라는 특별한 우주가 만들어낸 또 다른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