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내 나이 또래가 가장 많이 모인다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오십 넘은 아줌마인데 왜 이럴까요?'라는 질문이 올라왔다. 글의 내용은 쉰다섯인데 인생이 허무하고 자꾸 다 산 것 같으며 희망도 없고 무엇보다 그 많던 열정이 사라졌다는 하소연이었다. 밖을 보면 비슷한 또래의 활기찬 주부님들이 계신데 비법이 무엇일까요? 웃음과 활력을 찾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는 이 글은 조회수 만사천 개를 넘기며 최근 많이 읽은 글에 올랐다.
수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 갱년기 우울증이다 나도 그렇다며 늙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글쓴이보다 더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 글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댓글을 달았다.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알기에 그리고 지금 그 시기를 빠져나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RE 남일 같지 않아서 말씀드립니다. 그 시기도 지나갑니다. 흙탕물이 흘러내려올 때 물을 휘저으면 물은 더욱 지저분해집니다. 가만히 기다려야지요. 시간이 지나면 흙은 가라앉고 물은 다시 맑아집니다. 힘겨운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고 싶어 집니다. 저는 십 년 걸렸습니다. 마흔일곱 살에서 쉰일곱 살까지 죽도록 힘든 시기를 보내고 살아났습니다. 암에 걸려도 치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살고 싶습니다. 부디 마음 다독이며 잘 버텨내시기를..... 그럼 또 좋은 날이 옵니다.
나는 진심이었다. 내가 겪은 그 험한 어둠을 잘 알기에 누군가 동굴 입구에서 그 어둠에 겁을 집어 먹고 있으니 미약하나마 작은 촛불 하나라도 손에 쥐여주고 싶었다.
폐경 이후 십 년, 나는 어둠 컴컴한 동굴을 의지할 빛 하나 없이 손 끝으로 거친 벽을 더듬으며 걸었다. 때로 물웅덩이에 빠졌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오 년쯤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라는 기대로 한해한해를 넘겼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끝까지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앞으로 십오 년만 더 버티자 싶었다. 십오 년만 버티면 일흔이고 그 정도면 죽어도 될 것 같았다. 죽어도 되는 나이가 정확히 몇 살부터 인지 모르지만 나는 일흔이면 되었다고 여겼다. 일흔까지만 참고 그 이후에는 참지 않겠다고 이 지긋지긋한 몸뚱이를 더는 견디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끝을 못 박아 두자 좀 살 것 같았다. 앞으로 십오 년만 참으면 되니까. 그깟 십오 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023년 가을 무렵 나를 괴롭히던 만성 증상들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해는 일 년 내내 항생제를 먹었다. 어떤 병원에서는 염증이 나온다고 하고 어떤 병원에서는 염증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내내 아팠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몸이 기울었고 옆구리 통증은 온몸을 긴장시켰다.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하자 옆구리 통증이 진정되었다. 그래서 항생제를 중단하자 검사에서 제대로 염증 반응이 나왔다. 혈압은 170까지 올라가고 두통에 진통제는 거의 중독 수준으로 먹었다. 정말 십오 년만 참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던 날들이었다. 나는 십오 년 내내 그렇게 살 줄 알았다.
비뇨기과에서 방광에 직업 약을 주입하는 시술을 받았다. 심장내과에서 다양한 검사를 하고 약을 증량했다. 신경과에서는 뇌전증 약을 추가로 처방했다. 그렇게 지난한 시간을 보내던 끝에 저 멀리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빛의 시작 지점에서 힘찬 아기의 울음이 들렸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직 아스라한 빛줄기만 보일뿐 내 눈앞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렇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기의 울음은 동굴 밖에서 들렸다. 아기를 보기 위해 그 동굴을 나가야만 했다.
나는 이제 암에 걸리면 항암치료를 받겠다고 생각할 만큼 살고 싶다. 본래 체력이 저질인 데다 나이도 먹었으니 많은 걸 기대하지 않는다. 약을 먹고 관리하면서 일상생활을 해나갈 만큼만 되면 만족한다. 지금 그걸 잘 해내고 있다. 삶은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다. 나는 남들보다 뒤늦게 운전을 시작했다. 다음 달이면 삼 년 할부로 산 내 차의 할부가 끝난다. 그 차를 사기 전에는 가까운 출퇴근 정도는 했지만 주차가 어려운 곳에 가지 못했고 고속도로는 언감생심이었다. 오십 대에 첫차를 산 나는 날개옷을 찾은 선녀처럼 자유롭다. 내가 살아서 아기를 보러 300킬로를 달겨간다. 일찌감치 운전을 한 사람들은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내가 몹시도 자랑스럽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은 거다. 하지만 늦었다고 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남들이 모두 해외여행을 다닐 때도 나는 한 번도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나는 먹을 줄 몰랐기에 맛도 몰랐다. 그런데 동생과 일본의 작은 도시를 다녀오고 마음이 달라졌다. 내 체력에 액티비티 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소소하게 이박삼일 다녀온 여행인데 그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데려가는 여행 말고 내가 직접 계획해서 다녀오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비행기 표를 직접 끊고 숙소를 예약하고 구글지도로 타임테이블을 만드는 일이 하고 싶었다. 나는 언제 가게 될지도 모르는 여행 계획을 짜고 그 도시에서 봐야 할 것들을 챙기며 교통편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일흔에 죽기를 꿈꾸던 내가 아니었다.
포유류 중에 폐경이 있는 동물은 이빨 고래와 인간에게만 있다고 전해졌다. 최근 들어 야생 침팬지들도 폐경을 겪는다는 것을 알았냈다. 학자들은 대부분의 다른 포유류와 다르게 인간은 어째서 폐경을 겪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연구 결과를 냈는데 그중에 가장 설득력 있는 게 할머니 이론이다. 나이 든 여자가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보다 자식의 아이인 손자를 키우는 걸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는데 더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폐경 이후 지독하게 힘든 십 년을 보냈고 손자를 만나면서 그 시기를 탈출했다. 할머니 이론으로 보면 나의 DNA가 목적을 찾아 호르몬의 균형을 맞추어 준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필연이라면 또 필연일 수 있을 것이다. 어여쁜 우리 아기는 아직 불안한 자세이기는 하지만 혼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불안을 메우기 위해 머리 보호대를 채워 놓았다. 머리 부분을 동그란 쿠션으로 만든 꿀벌 모양의 보호대다. 더듬이까지 달린 꿀벌이 아기 등에 매달린 모습을 보면 아기 머리 대신 내 심장이 쿵한다.
옆으로 넘어지거나 앞으로 넘어지면 아무 쓸모없을 것 같은 머리 보호대가 용도 외의 역할을 한다. 그건 극강의 귀여움이다. 등에 더듬이 달린 벌을 달고 앉아 있는 아기모습을 보고 탄성을 지르지 않을 사람이 없다. 나는 노란 줄무늬 벌이 무슨 용도인가 생각할 틈도 없이 탄성부터 질렀다. '이건 너무 귀엽잖아!' 세상 어떤 것도 귀여운 걸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아름답다는 키레이보다 귀엽다는 카와이를 더 예쁘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게 설득력 있는 말이 아닐까 싶다.
삶에서 탄성을 되찾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굴러간다. 나는 십 년을 버텼고 그 출구에서 아기를 만나 매일 감탄한다. 귀여워서 감탄하고, 신통해서 감탄하며 그 활기에 감탄하다. 예전에 어린 아기는 양기가 넘쳐 이제 음기가 된 조부모와 살면 균형이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같이 살지도 가까이 살지도 못하지만 5G가 전해주는 전파에서도 나는 충분히 양기를 전해받는다. 낮은 포목으로 거실을 스무 바퀴쯤 돈다는 아기의 힘찬 기운이 내게 전해져 온다.
삶의 희망과 열정을 잃어버렸다고 고민하는 당신, 아기가 아니더라도 버티다 보면 어떤 존재가 당신을 그 어두운 터널 밖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부티 버티는 동안 당신이 조금 덜 힘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