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임신을 하기 전부터 '나는 낳을 테니 남편 너는 키워라. 그게 공평하지 않은가'라고 주장했다. 지금 mz세대들에게서는 남녀의 역학관계가 비교적 균형이 맞는다고 하지만 전 세대에 아울러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여자들에게 불리한 측면이 있다.
출산과 육아, 가사까지 여자가 떠맡은 상황에서 맞벌이까지 요구받는 것이 오십 대의 내가 겪은 현실이다. 사회에서는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아기 엄마들이 많았다. 그렇게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은 아이들이 품에서 떠난 뒤에 다시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대부분 그 일은 출산 전에 하던 일과 전혀 상관없는 단순노무직이었다. 그사이 출산율은 대폭 떨어졌고 사회는 이제야 여성이 아이를 낳고도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느라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고 있다.
결혼생활은 딸의 말대로 공평하게 5:5가 가능하지 않다. 요즘 말이 많은 신혼집 반반부담은 돈 문제이기 때문에 똑같이 나눌 수 있지만 생활을 그렇게 반갈라 너는 이거하고 나는 저거하고 가 될 수 없다. 네가 밥을 하고 내가 설거지를 한다고 요리 담당이 늦는 날 밥을 하지 않고 기다리며 네 일이니 내가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결혼생활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편이 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옳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래도 손해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부분 배려하고 형편이 되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은 여자였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 어머니의 희생으로 자라 어머니처럼 희생하는 아내를 꿈꾸었다. 50년 전에는 하수영이 젖은 손이 애처로워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애처롭다고 했고 30년 전에는 지오디가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며 눈물을 흘렸다.
치매 아내를 떠나보내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어웨이 프롬 허'에서 남편이 우리 부부는 평생 잘 살아왔고 행복했다고 부르짖자 간호사가 조용히 일침을 놓듯 말한다. 그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는지 생각해 본 적 있느냐고 말이다. 그렇다 결혼 생활은 결코 공평할 수 없다. 공평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요즘 딸들은 양보만 하다 보면 결혼생활이 자칫 여자에게 모든 짐이 지워진다는 것을 알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이 결혼을 통해 얻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서 결혼에 대해 미온적이다. 연애는 여자가 결정권을 가지지만 결혼은 남자가 결정권을 가진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그럴싸하게 사랑으로 포장되지만 그 안에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들이 오고 간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수면아래 온갖 마음들이 들끓는 와중에 사위는 그래 네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내가 주양육자가 되리라 호기롭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사위는 그 말을 지켰다.
딸이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사위는 직장을 다니며 부서장의 날 선 눈초리와 부서원들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뒤로하고 단호하게 칼퇴근을 했다. 그리고 집에서 온갖 살림을 하며 밤새 아기를 돌보느라 잠을 설쳤다.
세상 신기한 것은 아기는 그걸 정확하게 안다는 것이다. 아기는 주양육자가 엄마가 아닌 아빠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서 세상에 태어난 첫 웃음을 아빠에게 주었고 가장 큰 웃음도 아빠에게 주었다. 아직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시절 고개를 모로 돌려 아빠를 보자 아기 눈에 별빛이 들어왔다. 아기는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주는 아빠를 향해 햇살아래 꽃잎을 펼치는 튤립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아기는 얼굴 표정을 만드는 미세한 근육 하나하나까지 빠트리지 않고 모두 동원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전달했다. 아빠는 내가 똥을 싸서 침대까지 다 버려놔도 콧노래를 부르며 얼른 데리고 가서 씻겨주는 사람이고 내가 배가 고파 울면 재빨리 우유를 타러 일어서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아기에게는 세상의 전부인 것이다.
남편에게 주양육자 자리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자기도 나름 열심히 아기를 돌본다고 생각했던 딸은 이런 아기의 반응에 약간 서운했다고 한다. 양손에 떡을 쥐고 싶어 했던 딸은 바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일의 결과라고 말이다.
딸의 결혼생활은 결코 공평하지 못했다. 세상 어떤 일보다 자기가 만든 가정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위가 희생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딸은 그걸 잘 알기에 남편에게 많은 공을 돌린다. 아기를 키우는 일은 역시나 힘든 일이었다. 그 아이가 자라 살아갈 세상 하나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니 부부가 매달려도 힘겹다.
사위는 아기의 환한 웃음을 얻고 수면 부족으로 인한 면역체계 교란으로 갑작스러운 밀가루 알레르기가 생겼다고 한다. 라면도 못 먹고 튀김옷을 입힌 치킨도 못 먹으며 빵도 먹을 수 없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고생하고 있는 젊은 부부가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다. 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사위는 자기 다리 위에서 사래가 걸릴 지경으로 응애응애 웃는 아기를 보며 둘째를 욕심낸다.
아, 그런데 밀가루 알레르기면 쌀떡볶이는 먹을 수 있겠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