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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가에게

by 은예진

숙소 문을 열자 딸 품에 안겨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아기가 보였다. 할머니는 아기가 놀라지 않게 최대한 자제하며 아기에게 소곤거렸다.


"세상에! 우리 아기는 여전히 사진 속과 다르게 조그맣구나. 왜 이렇게 작니?"


매일 구독하고 있는 사진 속 아기는 얼굴도 크고 다 큰 아이 같은데 실제로 마주하면 볼 때마다 놀란다. 사진과 다르게 아기는 너무 작다. 작은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낯선 눈빛으로 새롭게 나타난 할머니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명절에 아기를 데리고 최소 네 시간의 이동을 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우리가 적절한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적당히 여행의 기분을 낼 수 있고 그럼에도 아기에게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전주'를 골랐다.


전주라면 내가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바람에 두 번 방분해본 곳이다. 한 번은 당선인 인터뷰와 사진을 찍기 위해서, 또 한 번은 상을 받기 위해서 방문했었다. 두 번 다 정신없이 목적한 일만 마치고 올라오는 바람에 거의 스쳐 지나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전주는 풍년제과 초코파이와 함께 젊은이들이 전통을 즐기는 도시로 유명해졌다. 한옥마을과 인접한 숙소에 먼저 도착한 아기는 차 안에서 잘 자고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아 어른들을 안도시켰다. 배밀이를 시작했는데 팔 힘이 좋은 아기는 마치 아기 펭귄이 헤엄치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팔을 꼿꼿하게 세우고 허리를 들어 올려 날듯이 펄떡펄떡 뛰는 얼굴에는 의지가 넘친다. 이제 4개월째인 아기는 곧 무릎을 세우고 기어 다니겠구나 싶다. 어린 시절 체육 시간이 제일 무서웠던 둔하고 둔한 나는 벌써부터 몸의 움직임이 남달라 보이는 아기를 보며 체육 소녀의 자질이 보인다고 좋아한다.


이제 막 기어보려고 무릎을 세우다 옆으로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아기를 앞에 두고 어른들이 설레발을 놓는다. 공부를 해야지 체육을 하냐는 말에 나는 '아니, 체육대회 같은 거 할 때 반대표하는 소녀 말이야. 멋지잖아!' 아기를 보며 내 로망을 이야기하다 빈축을 산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릎을 세우며 안간힘을 쓰는 아기의 투지에 박수를 친다. 우리 아기 파이팅


딸 부부가 전주에서 먹어봐야 한다는 피순대와 먹거리를 사러 나간 사이 재워 놓았던 아기가 깼다. 당황한 남편은 딸에게 전화를 하자고 했지만 나는 아기를 안고 서성이며 말린다. 아무리 그래도 할머니 자존심이 있지 아기가 우는 게 무서워 딸을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아기는 곧 울음을 그쳤다. 나는 이 말랑하고 부드러운 존재를 품에 안고 아기 엄마를 기다린다. 딸을 키울 때 부르던 노래가 흥얼흥얼 다시 나온다. 아기는 잦아든 울음 끝에 히끗거리며 이마를 내 품에 비빈다. 아기에게서 들큼한 젖내가 난다. 나는 어느새 이렇게 나이가 들어 딸을 결혼시키고 손자를 봤구나. 금자동아, 옥자동아, 금을 준들 너를 사랴, 옥을 준들 너를 사랴, 금으로도 옥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너를 안고 있구나.


남편과 나는 수시로 감격한다. 우리는 너무 많이 부족한 존재였고 세상에 그다지 이로운 일도 하지 못한 필부였다. 겨우 딸 하나 낳아 키우는 것도 허덕였고 제대로 된 부모 노릇을 하지도 못했다. 그런 우리가 이렇게 큰 축복을 받은 것에 기꺼워한다. 아기는 우리 삶의 영광이며 축복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 금으로도 옥으로도 살 수 없이 귀한 아기와 같은 존재들이다. 어떻게 우리 아기만 더 특별하고 소중하겠는가.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 어느 한때는 이렇게 귀하게 길러져서 어른이 된 것 아닌가. 나는 아기 등을 토닥이며 그걸 상기한다.


내가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누구도, 만나기만 하면 흉을 보게 되는 누구도 가릴 것 없이 우리 아기처럼 소중한 존재였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기는 그렇게 철없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인류애를 일깨운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복수를 끝낸 문동은과 주여정이 여행을 떠나는 차 안에서 나오던 송골매의 노래 '아가에게'도 아마 그런 의미에서 사용했을 것이다. 학교폭력으로 망가진 문동은도 그렇게 소중한 아기였음을 상기시켜준 것이다.


달빛처럼 고요한 그대는 누구인가

햇살처럼 화사한 그대는 누구인가

그 누구의 사랑으로 여기에 서 있는가

영롱한 그대 눈빛은 내 모든 우울에 빛을 던지고

조그만 그대 입술은 외로운 마음에 위로를 주네

그대와 나의 만남은 보배로운 약속

내일은 그대의 것 내일은 소망의 날

나의 사랑아-


새해 새날, 세상 모든 아기에게 그리고 아기였던 이들에게 축복이 함께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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