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K401에서 이번에 근사한 영화를 하나 들여왔는데 시사회 보러 올래?>
<어떤 영환데?>
<와서 보면 알아. 깜짝 놀랄 만큼 좋은 영화라고 자부함.>
<정말? 기대되는데. 언제 어디로 가면 될까?>
<이번 주 금요일 저녁 7시 우리 회사 영상실에서.>
<정식 시사회가 아니고 내부 시사회인 모양이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민석의 초대에 구선아는 두근대지 않으려 노력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자주 만나지만 채영의 말마따나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게 어느 선까지 용인되는 건지 좀 아리송했다. 그런 마음을 표현하기도 어색해서 요즘 연락이 뜸했다. 대부분 연락은 선아가 먼저 하던 편이라 민석의 시사회 초대는 대단히 반가웠다.
논현동 사옥에 도착한 선아가 전화를 하자 민석이 아래층까지 내려와 그녀를 맞이했다. 민석에게 잘 보이려 엉뚱한 옷차림을 했다 발목을 다친 뒤로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짓은 그만두었다. 에스닉한 패션을 좋아하는 선아는 헐렁한 코트에 통바지와 집시풍의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머리가 짧은 그녀에게는 아주 잘 아울리는 스타일이었다.
“스타일 멋있네!”
“어? 나는 남자들이 이런 스타일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나는 네 스타일 되게 맘에 들어. 너 가끔 보면 제인 버킨처럼 시크해 보일 때 있어.”
‘이런 젠장. 진작 티 좀 내주지. 그럼 그날 내가 치마에 힐 신고 나갔다 발목 다치는 일 없었잖아.’ 선아는 입
술을 살짝 내밀었다 민석에게 마음을 들킬까 봐 재빨리 오므렸다. 민석은 영상실 문을 열고 선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기야.”
컴컴한 영상실 내부에 익숙해지기 위해 한참을 서 있었다. 민석은 그런 선아의 손목을 잡아 이끌며 가운데 자리에 앉혔다.
“뭐야? 내부 시사회라며 어째서 우리 둘 뿐이야?”
선아가 어둠에 눈이 익자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민석은 자리에 준비되어 있던 팝콘과 음료수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내부 시사회 맞아. 우리 둘이 보는 내부 시사회.”
선아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민석을 바라보았다.
“뭐야? 우리 둘만 보는 영화야?”
“응.”
민석이 선아의 손에 들려준 팝콘을 한 줌 집어 들며 말했다.
“너랑 나만을 위한 시사회야.”
선아는 민석의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이게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건 친구한테 하는 게 아니라 연인하고 하는 거잖아.”
민석이 피식 웃더니 선아 쪽 의자에 꽂혀 있는 콜라를 한 모금 빨아 마셨다.
“꼭 연인 하고만 이런 거 하란 법 있어? 나는 그런 법을 본 적 없는데. 친구하고 단둘이 영화 보면 양심에 저촉되는 일이야? 그런 거 아니면 그냥 영화나 보자.”
민석의 말에 선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에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딴생각 없이 몰입할 수 있었다.
남녀 주인공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전원 풍경은 아름다웠다. 특히 화가로 나오는 여 주인공의 그림이 어찌나 매력적인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갔지만 선아는 영화에서 빠져나
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때?”
영상실에 불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민석이 물었다.
“이걸 정말 민석 씨가 들여왔단 말이야.”
“나는 최종 결정만 했을 뿐이지. 영화 수입 팀에서 다하는 거지 뭐.”
“영화 대박 좋다.”
“그렇지? 나도 이 영화 보고 나서 이건 다른 사람이 아닌 너랑 꼭 봐야 하는 거구나 생각했어.”
“왜?”
선아가 고개를 돌려 민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민석이 집게손가락을 구부려 관자놀이 부근을 긁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냥 너랑 어울리잖아. 그렇지 않아?”
“정말 그것뿐이야?”
선아의 대담한 질문에 민석의 입이 막히고 말았다. 선아는 민석이 정말 그것뿐이라고 말한다면 앞으로 지금 유지하고 있는 친구관계도 티 안 나게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게 자신의 정신 건강에 더 이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채영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다. 친구라는 미명으로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 마음 휘저어 놓는 걸 방치하면 안 된다. 결국 선아 자신이 상처받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오늘 되게 이상하다.”
민석의 목소리가 긴장 때문에 떨리고 있었다.
“내가 이상한 이유를 모르면 그건 민석 씨가 아둔한 거야. 영화 잘 봤어. 나는 그만 가봐야겠다.”
선아는 최대한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하며 일어섰다. 민석은 대답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모습뿐이었다.
“너 왜 그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가볍게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영화 이야기 나누려고 했는데.”
“됐어. 오늘은 그럴 기분 아니야.”
선아가 나가자 민석이 따라붙으며 어떤 포인트에서 기분이 상한 건지 말해 달라고 사정했다. 선아는 건물 밖으로 나오자 참지 못하고 민석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순수한 친구라면 저런 내부 시사회 말고 진짜 관계자들이 모인 시사회에 나를 초대해야 하는 거야. 그거 알아?”
선아가 쏘아붙이자 민석이 자리에 굳은 듯 서서 선아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한테 좋은 영화 보여줄 마음에 그만…….”
“친구한테는 친구 대접을 하고 연인한테는 연인 대접을 해야 욕을 얻어먹지 않는 거야. 민석 씨는 지금 친구한테 연인 대접을 했어. 그러니까 친구인 내가 불쾌한 거지.”
선아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한 채 휙 돌아섰다. 민석은 그런 선아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잘 가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서 선아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선아가 그렇게 돌아가고 나서 혼자 남은 민석은 사무실로 올라가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