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줄 알았던 민석이 깜짝 놀라 어깨를 흠칫했다. 우혁이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왔냐?”
“나 여기서 한참 있었어. 큰 고민이 있는 모양이다. 사람이 들어와서 앉아 있는 걸 그렇게 오래도록 모르다니 무슨 일이야?”
“그게 말이야…….”
민석은 난처한 듯 좀 전에 선아 앞에서처럼 집게손가락을 구부려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내가 이번에 새로 수입한 영화를 영상실에서 구작이랑 같이 봤거든. 그런데 구작이 영화 잘 보고 나서 화를 내는 거야. 친구한테는 친구 대접을 연인한테는 연인 대접을 하라고 하니 그게 무슨 말인지.”
“너 정말 몰라서 물어?”
“아니 친구한테는 친구니까 내가 잘하고 싶은 것도 참아야 하는 거야? 친구라도 얼마든지 친구로 잘할 수 있잖아. 둘이서만 영화 보는 게 뭐 그리 엄청난 일이라고.”
“그래서 구작이 이제 친구도 그만하재?”
“그렇게 말한 건 아닌데 이대로 가면 어쩐지 친구도 끝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너는 정말 구작이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야?”
민석은 오늘따라 관자놀이에 자주 손가락이 올라갔다. 뭔가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데 여자 문제는 그렇게 정확하게 풀리지 않는 게 짜증스러웠다.
“나는 그냥 친구가 좋았는데.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글쎄다. 그것처럼 어려운 문제가 없으니 딱 떨어지는 답을 내기는 불가능하지. 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잘못한 거 맞아.”
“친구한테 연인 노릇을 했으니 잘못이다 이거야?”
“아니. 구작이 널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무책임하게 그 관계를 끌고 간 거.”
민석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할 말이 없었다. 확실하게 잘못한 거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영이 이죽거리며 못마땅해한 것도 이런 민석의 마음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민석은 체념한 듯 한숨을 쉬며 고백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좋아했는데 이제 그 마음을 접었음에도 쉽게 다른 여자를 마음에 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어.”
“고맙다. 민석아.”
민석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민석의 눈에 난감한 감정이 어렸다.
“뭐가?”
“그냥 네가 내 친구이자 대표라는 게 다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겠니. 그래서 다 고마워.”
“지금 그런 말이 나올 타이밍이 아니잖아.”
“야, 고맙다는 말은 어떤 타이밍에 나와도 이상할 것 없는 거야.”
민석은 차마 우혁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렇게 지고지순했던 감정도 아니었다. 처음에 잠깐 끌렸을 뿐 서아에게 자신은 친정 오빠 같은 기분이었다.
민석은 머릿속에 커튼이 한 겹 걷히는 기분이었다. 서아에 대한 마음은 가족 같은 감정으로 바뀐 지 오래인데 뭔가 알지 못하는 족쇄에 묶여 선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민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혁아, 나 좀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래? 어딜 가려고? 나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우혁이 싱글거리고 웃으며 민석을 붙들었다.
“미안한데 급한 일 아니면 다음에 이야기하자.”
“급한 일은 아니야. 내가 그동안…….”
민석은 우혁이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그런 민석을 보며 우혁이 손으로 이마를 치며 히죽 웃었다.
민석은 사무실에서 나가자마자 선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받지 않았지만 곧이어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 중이었어. 무슨 일로?
“지금 어디야?”
-기분이 좀 그래서 같이 한잔할 수 있는 친구 섭외 중이야. 갑자기 불러대려니 나오는 사람이 없네.
“그거 나랑 마시면 안 될까?”
-민석 씨랑은 싫은데.
“할 말이 있어서 그러니까 한 번만 만나줘라. 부탁이다.”
선아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 더니 숨을 길게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지금 나랑 술 한 잔 마셔줄 친구는 민석 씨 밖에 없는 건가. 슬프다.
“슬프지 않게 해 줄게. 어디서 만날까?”
-나, 강남 대로 한가운데야.
“어디든지 가 있으면 내가 그리로 갈게. 술집 가서 알려줘.”
선아는 내키지 않는 듯 뜸을 들이더니 결국 한숨 같은 대답을 했다. 민석은 재빨리 나서서 사무실 근처에 있는 꽃집에 들러 장미 꽃다발을 만들었다. 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신경 쓸 여력이 없어 그냥 빨간 장미로만 만들어 달라고 했다.
장미를 들고 부랴부랴 수제 맥줏집 안으로 들어가자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선아가 눈에 뜨였다. 선아는 혼자서 이미 치킨 한 마리를 시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민석은 재빨리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며 선아의 잔을 뺏어 한 모금 마셨다.
“여기 맥주 맛있다고 소문났는데.”
“그러네.”
선아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민석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장미를 그녀 앞에 쓱 내밀었다. 민석의 얼굴이 붉은 장미만큼이나 달아올라 있었다.
“이거 받아 줘.”
“이건 또 뭐야? 오늘 아주 가지가지하는구나?”
선아의 말에 민석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오늘 가지가지하기로 작정했어. 나 이제 너랑 친구 안 할래.”
“뭐야 진짜.”
선아는 짜증 난다는 듯 빨간 장미를 밀어냈다. 하지만 민석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장미를 쥐여주었다.
“선아, 너 그냥 친구 말고 여자친구해라.”
“뭐? 뭐라고?
선아는 수제 맥줏집의 음악 소리 때문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풀이해 물었다. 민석은 똑같은 말을 백 번이라도 할 수 있다는 듯 외쳤다.
“너랑 진짜 사귀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