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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살아봐

by 은예진

우혁은 서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엄마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어. 뿌리 없는 식물처럼 말라죽어가던 시절에 길거리 캐스팅으로 우명진의 소속사에 들어갔거든. 천애 고아인 나는 우명진이 어떻게 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 만만한 아이였지.”


우혁은 자신이 우명진의 소속사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고 어떤 일을 해야 했는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이야기했다. 동영상에서 본 일들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우명진에게 맞은 이야기를 하는 우혁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죽으려 작정했던 날 서아의 아빠를 만났다. 그 뒤에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그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강우혁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까지 모두 다 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난로도 켜지 않은 십일월의 카페 안은 손이 시리게 싸늘했다.


“차현준이 도대체 그 동영상을 어떻게 구한 거지?”

“글쎄다. 어떤 식으로든지 우명진과 연락이 닿았겠지.”

“바보 같은 차현준. 내가 그 일로 오빠에 대해 실망할 줄 알았나 봐.”

“너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니?”


우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아를 응시했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어. 당연히 마음 아프지. 도와줄 사람 하나 없던 오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데.”

“장인어른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았지.”

“우리 아빠가 미래의 사위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달려갔다니 참 신기하네.”


밤이 깊었고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어 난로도 켜지 않은 실내가 너무 춥다는 것을 깨달은 서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일어서?”

“난로라도 켜야 할 것 같아서.”


우혁은 서아를 다시 자리에 주저앉히며 말했다.


“난로 켜지 마. 내가 따뜻하게 해 줄게.”

“그게 무슨 소리야?”


우혁은 서아의 몸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무슨 소리긴 우리 둘이 체온을 보태보자는 말.”

“싫은데.”


서아가 정색을 하자 우혁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내, 내가 뭘 잘못 생각한 거니?”


우혁은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긴장해서 입술이 바싹 마르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당연하지.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야?”

“미안하다. 서아야. 내가, 내가…….”


우혁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우혁을 새침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서아가 손으로 자신의 감싸 쥐었다.


“배 안 고파? 우리 저녁도 안 먹고 지금 열두 시가 넘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밥을 먼저 먹어야지.”

“은서아 너!”


우혁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주저앉을 뻔했다. 긴장감이 풀리자 온몸에 힘이 빠져 움직일 기운도 없었다. 우혁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자 서아가 손을 내밀었다.


“거봐, 배가 고프니까 힘이 없어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잖아.”


우혁은 장난스럽게 그를 놀리는 서아를 거칠게 잡아끌어 그의 품에 안았다.


“은서아, 너 벌 좀 받아야겠다.”

“벌? 내가 왜 벌을 받아?”


서아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우혁의 얼굴을 피하지 못했다. 우혁은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며 서아의 얼굴에 빠삭 들이밀더니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서아는 우혁의 입술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우혁의 몸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어깨가 시렸던 서아는 그 온기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싶어졌다.


서아의 손이 우혁의 어깨를 잡자 고개가 조금씩 뒤로 젖혀졌다. 스툴에 앉아있는 그녀의 몸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우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평생 아무에게도 제대로 말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가슴에 납추를 달아놓은 듯 몸을 무겁게 만들던 것들이 무게를 잃고 흩어져 버렸다. 몸이 갑자기 깃털처럼 가벼워진 기분이다. 이제 서아가 어디로 가든지 절대 놓치지 않고 잡아챌 수 있을 만큼 가벼워졌다.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너랑 헤어지지 않을 거야.”

“사람 일을 어떻게 알아?”

“살아봐. 그럼 오십 년 뒤에 내 말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서아는 우혁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가 다시 입술을 덮어버리는 바람에 반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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