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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이거 진짜 미치겠네

by 은예진

“민석 씨가 고백하면 내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아먹을 줄 알았냐?”


쌀쌀맞은 선아의 말에 당황한 민석은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남들 보니까 우선 앉기나 해.”


선아가 민석의 술을 주문했지만 입이 마른 민석은 그녀의 잔을 먼저 비웠다.


“그러게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네. 내가 사귀자고 하면 너는 당연히 사귀는 건 줄 알았으니 뭔가 좀 웃기는 생각이었다.”

“기분 나빠서 민석 씨랑 안 사귈 거니까 꿈도 꾸지 마!”

“내가 너보다 몇 살 더 많지?”

민석이 뜬금없이 나이를 물었다.

“민석 씨가 세 살 더 많은 걸로 아는데. 그건 왜?”

“나는 너를 너라고 하는데 너는 나를 민석 씨라고 하기에 잠깐 생각해 봤어. 우리가 나이 차이가 어떻게 나는 건가 싶어서.”

“칫. 나도 너라고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우혁 오빠랑 족보가 꼬이잖아.”

“아, 우혁이가 있지.”

“그렇지 우혁 오빠가 있지.”


우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민석의 눈에 반짝하고 불이 들어왔다. 지금까지 우혁이랑 같이 일하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지금 해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우혁아 나를 용서해라.’

“구선아! 너 있잖아. 달콤한 너의 맛 시즌 투에 재결합한 강우혁이 내보내고 싶어 했잖아.”

“그랬지. 민석 씨가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해서 포기했지만.”

“그거 내가 추진해 볼게.”

“정말?”


선아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옆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또 하려고 마음먹으면 못할 것도 없잖아.”

“왜? 절대 안 된다고 하더니 무슨 마음으로.”


민석이 옆에 내려놓은 장미를 집어 들고 다시 선아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선아는 양손으로 팔을 문지르며 진저리를 쳤다.


“이러지 마세요. 나 이러는 거 질색이에요. 소름 돋잖아.”

“알았어. 진지하게 다시 말할게. 나도 내 마음을 정확히 몰랐어. 친구한테는 친구 대접을 해야 한다는 네 말을 들으면서 깨달았어. 내가 널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민석은 톤을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선아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이거 예상치 못한 전개라 어떻게 결말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이 꽃을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민석은 재차 꽃을 내밀며 채근했다. 선아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꽃 대신 술잔을 잡았다.


“뜬금없이 꽃다발이라니 내가 입었던 스커트와 하이힐만큼이나 진부하군.”

“그럼 우리 퉁 치자.”

“싫은데.”


그렇게 실랑이를 하며 술잔을 계속 비웠다. 민석의 맥주 주량은 열 캔쯤 되었고 선아는 대여섯 캔쯤 되었다. 두 사람은 정신 줄을 놓고 주량을 초과해서 파인트 잔을 계속 비웠다. 뭔가 어색한 상황을 술로 막음 하려는 시도가 성공해서 웃음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 더는 못 마시겠다. 일어나자.”


선아가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따라 일어선 민석은 계속 이차를 가야 한다며 채근했다.


“노래방 가자, 노래방! 아닌가? 포장마차 가서 소주로 입가심을 할까?”

호프집 밖으로 나가자 초겨울 바람이 강남의 좁은 골목길을 강타하고 있었다.

“악, 추워 너무 추워.”


선아가 비명을 질러대자 민석이 호기롭게 자신의 코트를 벗어 선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우리 선아가 추우면 곤란하지.”

“진작 이런 거 해보지. 이제 와서 뭐야. 난 당신한테 마음 다 식었어.”

“진짜? 에이 아닌 거 같은데?”


민석이 선아를 붙들고 확인해 봐야겠다며 코끝이 닿도록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댔다. 선아의 숨결에서 에일 맥주의 홉 냄새가 새어 나왔다. 선아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굳은 듯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민석이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면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 모르겠네.”


선아는 기가 막혀서 장미 꽃다발로 민석의 등을 후려쳤다.


“민석 씨, 진짜 상 바보구나!”

“내가 왜?”

“됐으니까 따라와. 당신한테 맡겨놨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겠어.”


선아가 앞장서서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을 헤치고 걸었다.


“어딜 가는 건데? 이쪽으로 가면 노래방도 없고, 포장마차도 없는데.”


민석이 뒤에서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남 대로의 긴 횡단보도를 지나 한참을 걸어가던 선아가 돌아서서 민석을 향해 말했다.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


그 목소리가 어찌나 강한지 민석은 꼼짝 못 하고 따라갔다. 그렇게 선아를 따라간 민석은 호텔의 승강기 안에 들어가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놀랐다.


“지,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확인하자며? 이건 순전히 술김에 든 생각인데. 이대로 친구를 끝낼지 아니면 애인이 될지는 한번 자봐야 알 것 같아.”

“헉!”


놀란 민석의 얼굴에 눈이 절반쯤 차지하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놀라? 확인해 봐야겠다며. 거두절미하고 이거만 한 확인이 어디 있다고.”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싫어? 싫으면 관둬. 나는 들어가서 잘 테니까 민석 씨는 가.”


선아는 카드 키를 손잡이에 대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민석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의 앞에서 문이 쾅하고 닫혔다.


“이거 진짜 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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