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서 서아가 그리워하던 블랙베리 향기가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이 같이 쓰던 침구도 그대로이고 베드 테이블에 있던 결혼사진도 그대로 있다.
‘이럴 거면서 왜 그렇게 못 보내서 안달이었던 거야. 바보.’
사진을 보고 있자니 차현준에게 협박당했던 우혁이 생각나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뭐 해?”
따라 올라온 우혁이 문을 열고 물었다. 서아는 사진을 들어 올리며 우혁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장 대표님 왔어?”
“응, 지금 들어왔어. 구 작가랑 다들 너 보고 싶다고 난리야.”
“내려가기 전에 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
우혁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와 서아의 옆에 앉았다.
“뭔데? 오늘 같이 좋은 날 왜 사람 겁나게 만들어?”
“진작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우리 사이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말하지 못했어.”
우혁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눈빛이 어두워졌다.
“오빠 과거 말인데…….”
“서아야!”
그때 채영이 문을 확 열어젖히고 뭐 하는 거냐고 소리를 질렀다.
“설마 우리를 아래층에 죄다 놔둔 채로 둘이 여기서 십구 금을 연출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냐! 우리가 옛날 생각이 나서 결혼사진 좀 보고 있었다. 내려간다.”
우혁은 채영이 너무 반가워서 하마터면 그녀를 껴안아 줄 뻔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우혁이 서아를 잡아끌고 방을 나섰다. 배달음식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민석과 구 작가가 거실에 술자리를 마련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채영이 우혁과 서아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자 갑자기 폭죽이 터지면서 꽃가루가 사방으로 퍼졌다. 등 뒤로 폭죽을 감추고 있던 민석과 구선아가 폭죽 세례를 퍼부었다. 놀란 서아가 우혁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우혁은 머리 위에 떨어진 꽃가루를 흩어내며 활짝 웃었다.
“재결합 축하해요!”
민석이 진심으로 반갑다는 표정으로 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아는 그의 곁에 서 있는 구 작가를 보고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분 사귀시는 거예요?”
옆에서 못마땅한 듯 입을 비죽거리던 채영이 끼어들었다.
“둘이 친구래요. 친구가 맨날 저렇게 붙어 다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장 대표님이 나하고도 친구 했었는데 구 작가님 하고도 친구 하는 모양이네.”
“네? 우리 민석 씨가 서아 씨하고도 친구를 했었다고요?”
구 작가가 몹시 놀랍다는 듯 끼어들자 채영이 우습다는 듯 대답했다.
“구 작가, 친구는 애인하고 달라서 누구 하고나 할 수 있는 거거든요. 나도 어떻게 보면 민석 오빠랑 친구거든. 그렇지 오빠?”
민석은 난처한 얼굴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그냥 사귄다고 해. 서른이 넘은 남녀가 무슨 친구랍시고 유치하게…….”
보다 못한 우혁이 채영을 끌어다 자리에 앉히며 진정하시라며 달랬다.
“민석이랑 구작이랑 친구를 하든지 애인을 하든지 왜 네가 그렇게 신경을 쓰니. 놔둬라.”
“몰라. 나는 내숭 떠는 사람들을 보면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맥주를 한 캔 따서 들이킨 채영이 캬 소리를 냈다.
“아, 시원해. 이제야 속이 풀리네. 그래 두 사람 애인을 하든지 친구를 하든지 니 맘대로 하시고 우리 은강 커플의 재결합이나 축하하자고요.”
어색했던 분위기는 술잔이 돌아가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은 사양할게. 지금은 서아랑 나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만나서 행복하니까 그것만 생각하고 싶어.”
“좋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랑이여 영원하라! 건배”
채영의 건배에 술잔이 부딪치고 흥겨운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술을 마시다 보니 우혁의 드라마가 방영될 시간이 되어 구 작가 텔레비전을 틀었다. 채널을 돌리던 선아가 놀라서 리모컨을 누르던 손을 멈췄다.
“차현준?”
차현준이라는 말에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텔레비전에 쏠렸다. 실형을 선고받았던 차현준이 출소하는 장면에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다. 차현준은 세상 가장 선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호기심에 치기 어린 짓을 했습니다. 앞으로 참회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팬들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세상에 너무 빨리 나오는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 법이 남성 가해자한테는 정말 솜방망이라니까.”
구 작가가 투덜대며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서아는 우혁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우혁의 과거에 대해서도 동영상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차현준이 정확히 어떤 동영상을 가지고 우혁과 얽힌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대로 넘어가면 우혁의 과거 때문에 또다시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