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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집에 오니까 좋다

by 은예진

점심때쯤 되자 배가 슬슬 고파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아침도 굶은 상태에서 에너지를 썼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사랑만으로도 배가 부를 줄 알았는데 아니네.”


우혁의 말에 서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를 때렸다. 주먹 끝에 닿은 우혁의 탄탄한 근육에 등줄기가 저릿했다.


“라면 먹을래?”


라면을 발음하는 서아의 목소리가 약간 허스키하게 갈라졌다. 우혁은 서아의 팔을 잡고 그녀의 몸을 끌어당기며 웃었다.


“라면이라는 말에 나 괜히 또 설레네. 이건 뭐지. 배가 고픈 게 아니었나?”


우혁의 장난에 서아가 어이없다는 듯 몸을 비틀었다.


“진짜 라면 맛 한 번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진짜 라면 맛이 뭔데?”


서아는 이불로 가슴께를 가린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긴 뭐야 파 송송 계란 탁에 찬밥까지 갖춘 게 진짜 라면 맛이지.”

“우와, 듣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데.”


셔츠 하나만 걸친 서아가 가게 안쪽 제과실로 들어가더니 곧 라면 냄새가 퍼졌다.


“오빠, 라면 다 삶았으니까 나와서 먹어.”


서아가 셔츠만 입은 것과 반대로 우혁은 바지만 입은 채 나가서 제과실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서아가 가스 불에서 내려놓은 노란 양은 냄비 안에서 익지 않은 계란 노른자가 반짝거렸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지금까지 먹어본 라면 중에 가장 맛있는 라면이라며 감탄했다.


“지금 뭘 먹으면 맛없을까.”


서아의 말에 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금 우리 둘이 먹으면 웬만하면 다 인생 최고의 맛이 될 듯. 하지만 이 라면은 정말 맛있는데.”

“그렇기는 하다.”


라면 두 개를 먹고 찬밥까지 말아먹은 서아가 냄비를 옆으로 쓱 밀어 놓더니 우혁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이제 배도 부르겠다 나도 정신을 차렸으니 오빠한테 제대로 들어야겠습니다.”

“뭘?”

“몰라서 물어?”


서아가 눈에 힘을 주고 쏘아보자 그제야 생각난 듯 피식 웃었다.


“아아, 그거! 채영이 생각이었어. 내가 스캔들을 내보면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하잖아. 채영이 걔 생각보다 똑똑해!”

“세상에, 채영 언니가 나한테 이렇게 배신을 때렸단 말이야?”

“야, 이게 어떻게 배신이야. 이건 은혜지. 너는 은혜하고 배신도 구분 못 하냐?”


아직 라면에 미련이 남은 우혁이 냄비 째 들고 남은 국물을 들이켰다. 서아는 억울함을 참지 못해 두 팔을 들고 부르르 떨며 용서할 수 없다고 씩씩거렸다.





서아가 우혁을 따라 한남동 타운 하우스에 들어서자 칠월이는 마치 알고 있다는 듯 채영의 집을 나섰다. 서아와 동시에 우혁의 집에 도착한 칠월이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서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아옹. 아웅.”


신경질적으로 야옹거리는 고양이를 품에 안은 서아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칠월이의 이름을 부르며 품에 안고 털에 얼굴을 비볐다.


“하아. 은서아 나를 보고는 그렇게 반가운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지. 이제 보니 은서아한테 나는 칠월이 만도 못했구나.”

“그걸 이제 아셨다니 놀랍네.”


서아가 칠월이를 내려놓고 우혁을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서아는 우혁과 자신의 스캔들이 가짜였기 때문에 지민과의 조작 스캔들도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거였다며 화를 냈다.


‘너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 스캔들 나는 가짜 아니었어. 단지 내 마음을 내가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을 뿐이야. 그때 사실 스캔들 말고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어. 그런데 내가 스캔들이 내고 싶었으니까 낸 거야.’

‘쳇,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 누구는 못하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아도 우혁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꽉 달라붙어 있는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진짜 집을 둘러보며 서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동안 파리로 부암동으로 돌아다녔지만 그녀 마음의 집은 오직 이곳뿐이었다. 집을 잃은 채 떠돌던 그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몸과 마음이

제자리를 찾은 듯 평온해졌다.


“칠월아, 집에 오니까 좋다. 그치?”


서아가 손바닥으로 소파와 계단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걷고 있을 때 밖에서 칠월이를 부르는 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칠월이 너 이놈의 계집애 또 우혁 오빠네 집에 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구나. 그냥 거기서 살아라.”


서아가 거실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칠월이 때문에 대문 비밀번호를 받아둔 채영이 마당에서 두리번거리며 칠월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언니!”


예상치 못한 서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채영이 ‘어머’를 외치더니 그대로 달려들었다.


“꺅, 은서아, 칠월이보다 더 얄미운 이놈의 계집애 드디어 돌아왔구나.”

“응, 언니 덕분에 이렇게 돌아왔네.”


서아가 유감이라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하자 채영이 깔깔대며 웃었다.


“너 그렇게 놔두면 세월도 없겠더라고.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지.”


우혁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채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훌륭했어. 최고야, 윤채영!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채영이를 그렇게 구박하지 않았을 텐데. 미안하고 고맙다.”

“말로만은 절대 안 되지. 나 비싼 여자야.”

“알았어. 말만 해. 내가 한 재산 팔아서라도 보상해야지 어떻게 그냥 지나갈 수 있겠니. 나한테 서아를 되찾아준 사람인데.”


우혁의 말에 채영이 한심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흔들었다.


“쯧쯧, 저렇게 모를까?”

“뭘?”

“내가 아니었어도 두 사람 못 헤어졌어. 헤어졌을 사람들이면 이렇게 쉽게 다시 못 합치지. 내가 한 일은 너무 답답해서 손가락으로 한 번 쳐줬을 뿐이야.”


채영이 집게손가락을 허공에서 톡톡 치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모인 김에 환영파티 한 번 해야겠다. 오빠, 얼른 민석 오빠한테 연락해. 내가 한턱 쏠게.”

“그래 네 덕분에 이 자리를 만들었느니 네가 쏘는 게 맞겠다.”

“민석 오빠는 틀림없이 혼자 안 오고 구작이랑 올 거니까 다섯 사람 분량으로 준비를 해야겠지. 어디 보자 뭘 시켜야 상다리가 부러지려나.”


채영은 핸드폰을 보며 주문 버튼을 연신 눌러대고 우혁은 민석에게 전화해서 우리 서아 환영 파티를 할 거니까 열 일 제치고 오라며 성화를 댔다. 그 사이 서아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 우혁의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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