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들이 흔히 독서하는 방식을 병렬독서와 직렬독서로 나누어 분류한다. 직렬독서란 한 권을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읽는 방식이고 병렬독서는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방식이다. 나는 주로 직렬독서 방식으로 책을 읽었는데 어쩌다 이번에 병렬독서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독서 방식이 꽤 괜찮은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이번에 같이 읽은 책은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THE STORY OF ART', '프로젝트 헤일메리' 세 권이었다.
수면 장애가 진정되는 듯싶었는데 끊었던 이미프라민을 먹기 시작하면서 다시 심해졌다. 하지만 약을 끊는다고 또 바로 깊은 잠을 자는 것도 아니라 그러려니 하고 있다. 심한 날은 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 깨니까 다섯시쯤 눈을 뜨면 그냥 잠을 자지 않고 벽에 기대 책을 읽는 날이 늘어났다. 최근에 나보다 심하게 수면장애를 겪는 남편이 예민해져서 분리 수면을 제안했다. 따로 자고 싶으면 자기가 나가야 하는데 나보고 나가는 것을 아주 예의 바르게 말한다. (남편은 언제나 몹시 매너 좋고 다정한 말로 자기 편한 대로 한다.) 나는 그를 내보내면 내 맘에 들지 않게 방을 관리할 것 같아 그냥 내가 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평소에도 내가 몸이 좋지 않으면 다른 방에서 자 버릇해서 그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이런 연유로 혼자 자다 보니 아무 때나 불을 켜고 핸드폰을 보거나 책을 읽는다. 그 시간에 당첨된 책이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이동진 강력 추천의 2001년생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라니 기대가 되는 책이었다. 새벽 시간 세상 고요함을 등지고 나는 이 젊다 못해 어린 청년이 쓴 책을 읽는다. 세상에나 일 년에 천권의 책을 읽는다는 이 청년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인가. (젠장할 머리 좋은 것들은 참 좋겠다. 평범에서 좀 떨어지는 나는 그저 감탄만 할 뿐이다.)
소설은 액자 구조 형태로 독문학자 히로바 도이치와 함께 그의 취재 여행에 따라나선 사위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소설은 사위가 도이치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소설로 쓰는 형식이다. 소설 후반이 되면 이 사위의 정체가 나온다. 내가 새로운 방식으로 병렬독서를 한 것처럼 또 새로운 형식의 독서를 했으니 그건 재독이었다. 나는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를 읽고 나서 바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재독 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난해한 괴테와 인문학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사실 소설의 서사를 위해 복무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래서 굳이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한번 이 책을 읽는다면 그 장치를 서사와 제대로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재독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재독을 선택한 것이 좋은 선택임을 알았다. 이 소설은 제꼬리를 물고 있는 뱀인 우로보스처럼 끝과 시작이 맞닿아 있는 구조였다. 책장을 덮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히로바 도이치는 아내 아키코와 딸 노리카와 함께 교외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날은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로 노리카가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마련한 축하자리였다.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고 후식으로 홍차를 마시는데 그 홍차 티백에는 명언이 한 구절씩 쓰여 있었다.
도이치의 홍차 티백에는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d'이라는 말과 함께 괴테가 적혀 있었다. 학계에서 괴테 연구자로서 최고로 일컬어지는 도이치에게 괴테의 명언이라니 이건 마치 운명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괴테라고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다고 생각하는 도이치는 도대체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는 위의 문장을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 일체로 만든다.'로 해석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도이치가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 일체로 만든다는 말이 정말 괴테의 말인지를 찾아 나가는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괴테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 등장해 대단히 현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정하게도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자 스즈키 유이는 소설 속 도이치의 딸 노리카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정말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레스토랑에서 명언 꼬리표가 달린 홍차를 마시고 이 소설을 구상했다. 그리고 그는 노리카와 같은 영문학 전공생이다. 그가 학문에 임하는 태도는 노리카의 그것과 같을 것이다. 그런 스즈키 유이가 노리카 남편이 되어 이 소설을 쓰고 있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책의 뒤표지에서 '이 소설은 학자가 어떤 문장의 출처를 알아내는 것과 그 문장의 깊은 뜻을 살아내는 것은 별개라는 지혜를 노련하게 설파하면서 멋지게 그 일을 해낸다'라고 말하고 있다. 재독을 시작하자 나는 여유 있게 신형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재독은 흐릿했던 서사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보여준다.
긴 아침 시간을 보내고 출근하면 편의점에서 700백 원짜리 에스프레소를 한 잔 사서 우유를 부어 라테를 만든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를 펼친다. 펼친다는 말은 사실 적절하지 않은 관용어다. 이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책은 독서대에 끼워 펼쳐 놓은 상태였다.
읽기 쉬운 미술사 책을 몇 권 읽고 나니 본격적으로 미술사를 제대로 다룬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겁도 없이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를 샀다. 정가 53,000원짜리 책을 받은 순간 나는 그 압도적인 무게감에 뒤로 넘어졌다. 685페이지에 46 배판이라고 하는 B5크기다. 이거 정말 무기로 써도 될만한 수준이다. 무거워서 함부로 들기도 어려운 책은 펼치기도 전에 기에 눌린다.
너무 거대한 일을 가장 쉽게 접근하는 방법은 쪼개기다. 책 한 권을 들고 이걸 읽는다고 하면 부담스럽지만 챕터로 나눠보면 28개의 적당히 작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하루에 한 챕터씩만 읽기로 했다. 더 읽고 싶어도 가지 말고 하루 한 챕터라고 마음을 먹자 별거 아닌 게 되었다. 라테 한 잔 마시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챕터 하나는 금방 끝난다. 그리고 사실 곰브리치가 서양미술사를 쓰면서 이 책의 대상을 10대로 생각했기 때문에 내용이 쉽다. 책의 무게와 두께만 극복하면 술술 넘어가는 책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미술관에서 또 다른 것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책이 요즘 핫한 '프로젝트 헤일메리'다. 이건 윌라에서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출퇴근하면서 화장하면서 틈틈이 듣다 결국 점점 시간이 늘어나 집착하며 들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 과학 이야기가 아무리 나와도 서사의 흐름에 결국 압도당했다.
우주선 안에서 깨어난 그레이스는 자기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옆에 있는 두 동료들이 죽었다는 것 밖에. 그로부터 하나씩 기억을 되찾고 자신이 우주에서 혼자 타우세티를 향해 가고 있는 이유를 찾았다. 죽어가는 태양을 살리기 위해 타우세티로 온 그레이스는 지구로 돌아갈 수 없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은 결국 그레이스의 성장기다. 회피 성향 때문에 학계에서 자기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도망쳐 중학교 과학 선생이 된 그는 매사 그런 식이었다. 타우세티로 가기 위해 훈련받던 우주비행사들이 사고로 죽자 페트로바 선 대책위원장인 에바 스트라트가 그를 헤일메리호에 태웠다. 그레이스는 이번에도 절대 죽고 싶지 않다며 거부했지만 스트라트가 강제로 태워 타우세티로 가게 된 것이다.
회피형 그레이스가 외계인 로키를 만나 죽음을 불사하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성장담은 듣는 이를 짜릿하게 만든다. 어려운 과학 용어와 원리 따위 몰라도 상관없다. 이건 재독 아니라 삼독을 해도 나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괴테의 이야기는 재독으로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이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아무 상관없다. 그레이스가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 로키를 향해 헤일메리호를 돌릴 때 나는 코끝이 찡했다. 스트라트 앞에서 죽기 싫다고 발버둥 치던 그가 죽음을 결심하는 순간 주인공은 독자의 마음을 훔치고 감동을 선물한다.
직렬이건 병렬이건 책을 읽기만 하면 상관없지만 동시에 좋은 책을 여러 권 만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책을 읽다 창 밖을 내다보니 환한 3월의 햇살이 눈을 시리게 한다. 곧 꽃이 피려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