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 토머스 스터버 감독 / 크리스티안 (프란츠 고고스키), 마리온 (산드라 휠러), 부르노 (피터 쿠스)
몸에 기운을 주사기로 모두 뽑아낸 것만 같았다. 구역질이 나고 어지럽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통증이 있는 것은 아니라 그냥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비타민D주사를 맞을 때가 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나는 링거보다 비타민D주사가 더 기운이 나는 느낌이다. 그래서 링거도 맞고 비타민D주사도 맞았다. 하루에 한 뼘씩 기운이 올라오고 이번 주 들어서는 자고 나면 10프로씩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회복하고 있었다.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은 유튜브 쇼츠를 보거나 티브이를 보는 둘 중에 하나다. 그렇게 해서 당첨된 영화 '인 디 아일'이다. 그래도 쇼츠를 보고 있는 것보다는 영화를 보는 것이 낫다. 쇼츠를 온종일 보고 있으면 정말 머릿속을 텅 비워 쓰레기로 채워 넣는 것만 같다. 쇼츠를 보느니 롱폼을 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맞다 영화는 보고 생각이라는 걸 한다. '인 디 아일'을 보며 나는 내내 이토록 쓸쓸하면서도 다정한 영화라니 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인 디 아일'은 배경이 강력한 역할을 하는 영화다. 옛 동독 드레스덴 근처에 위치한 광활하게 큰 슈퍼마켓이 영화의 배경이다. 그리고 인 디 아일 즉 통로는 슈퍼마켓 진열장과 진열장 사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마켓 직원들은 그 사이로 지게차를 운행하며 가로 세로 누빈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도 가로 세로 겹치며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마켓에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음료 코너에서 일하게 된 크리스티안은 옷소매 안쪽으로 진한 문신이 언듯 보였다. 관리자는 손님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으니 가리라고 한다. 그 문신은 팔을 타고 올라가 어깨를 거쳐 등까지 이어져있다. 문신은 크리스티안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하게 한다. 그의 과거가 어떠하였는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그는 착실하고 과묵한 사람이다.
마켓에 왈츠 음악이 흐르고 지게차가 미끄러지듯 통로 사이를 누빈다. 그 지게차에는 음료 코너 선임인 부르노가 타고 있다. 부르노는 자신이 혼자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신입을 보내준 관리자에게 불만이 있는 듯 부르퉁하다. 그럼에도 크리스티안에게 텃세를 부리거나 함부로 하지 않는다. 부르노는 좋은 사람이다.
크리스티안은 부르노에게 일을 배우고 지게차 면허를 따기 위해 공부하며 마켓에 적응해 간다. 잠깐의 휴식 시간 커피 자판기 앞에 선 크리스티안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직원이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온, 사탕 코너에서 일하는 여자다. 크리스티안은 허허벌판처럼 느껴지는 삭막한 마켓 안에서 만난 마리온의 미소에 마음을 주고 만다.
크리스티안의 문신과 그를 찾아온 질 나쁜 친구들을 통해 시청자는 그가 전과자일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감추고 싶지만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과거는 그를 계속 괴롭힌다. 반면 쾌활해 보이는 마리온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아내였다. 마켓 사람들은 그런 마리온과 크리스티안이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며 마리온이 상처받을 것을 걱정한다.
동독 시절 트럭을 몰던 부르노는 슈퍼 마켓으로 변한 회사에서 고용을 승계해 지게차를 운전한다. 쓸쓸한 눈빛으로 트럭을 몰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부르노를 통해 우리는 구동독 사람들이 가지는 예전의 삶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이 영화의 다정함은 여기에 있다. 퇴근길 직원들은 한 줄로 서서 빠져나가고 그 길을 관리자가 배웅해 준다. 핀란드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도 여주인공 안사가 마켓 직원이다. 그들도 퇴근길 한 줄로 서서 나가는데 여기서 직원들은 신체검사를 당한다. 혹시라도 물건을 훔치는 직원이 있을까 봐 검사하는 것이다. '인 디 아일'의 마켓 직원들은 자본주의의 상징 같은 슈퍼 마켓에서 구동독 시절 가졌던 연대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
수습이 끝나고 정식 직원이 되어 음료 담당자가 된 크리스티안이 지게차를 몰고 통로를 지난다. 그를 향해 다가온 마리온이 지게차를 높이 올렸다 내려 보라고 한다. 유압으로 움직이는 지게차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 마켓은 바다로 변하고 두 사람은 자신들을 둘러싼 파도 소리를 음미한다. 이제 더는 그들 곁에 없는 부르노가 알려 줬던 이 소리가 쓸쓸하면서도 다정하게 들린다.
특별한 갈등도 대단한 스토리도 없는 영화다. 크리스티안이 전과자라는 건 처음부터 짐작이 가능하고 대단한 비밀도 아니다. 마리온이 겪고 있는 결혼 생활의 문제도 정면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갈등은 최대한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대신 스미듯 퍼지는 정서를 느끼게 하는 영화다. 크리스티안과 마리온의 관계 또한 대단할 것 없이 서로에게 머리를 기댈 뿐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주는 위로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수많은 ott에 넘치는 콘텐츠가 너무 많아서 선택이 불가한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인은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불행한 삶을 산다고 하는데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고르다 한 시간 동안 제목만 클릭하는 나를 보면 맞는 말 같다. 그럼에도 이런 영화를 만난 날은 뿌듯해진다. 영화는 끝났지만 나는 영화가 주는 여운에 생각에 잠겼다. 코로나 이후 우리네 삶은 개인화를 넘어 파편화가 되어 버렸다. 걸핏하면 손절이고 혼자서도 잘 산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삶을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타인의 온기가 필요하다. '인 디 아일'은 그 온기의 필요성을 사려 깊게 전해주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