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 드 경성
대정 권번의 행수는 본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리 오래갈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예상보다도 빠르구나. 우리 대정 권번은 가는 기생 잡지 않고 오는 기생 막지 않는다. 그게 대정 권번의 자존심이다. 그리고 사실 너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단순하게 너를 시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홍란이를 시험하는 것이었기도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홍란이는 나를 이어 대정 권번의 행수가 될 아이인데 최소한 기생 감을 알아볼 눈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동안 몇 번의 시험을 통해 그걸 증명하는 중이었다. 나는 네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홍란이는 아직 그걸 볼 만한 경지는 아니더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다. 넌 너무 많이 읽었어. 책 읽는 여자는 남자들을 두렵게 해. 지금 당장은 너를 시험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소문 때문에 네 인기가 좋지만 그게 오래갈 수 없거든. 네 말대로 살롱에서 너를 감당할 수 있는 남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기생은 술자리의 꽃이지 주인이 아닌데 넌 잘못하면 그 술자리의 주인이 될 우려가 있으니 권번의 입장에서 위험한 일이야. 네가 대정 권번의 이름을 날려주었으니 그만하면 되었다.”
본이는 살롱을 어떻게 차리게 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명주는 그게 조원구 정도 되지 않을까 짐작할 따름이었다.
유성준
당신은 늘 그러하듯이 제 기대를 뛰어넘는군요. 이곳에 들어서기도 전에 당신의 아우라에 숨에 막혔습니다. 그리고 당신 손을 잡고 체온을 느낀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릴 뻔했습니다. 내가 왜 일본에서 돌아왔는지, 내가 왜 아버지에게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해가며 돈을 얻어냈는지 말입니다.
그날 명월관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까지만 해도 당신에 대한 내 감정을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검은 나비 가면을 쓴 여자의 목소리가 당신의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봉인되었던 감정이 홍수에 범람하는 강물처럼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풍기던 정갈한 동백기름 냄새도 동그란 귓불 밑으로 보이던 하얀 목선도 내 손아귀에 들어왔던 작은 손도 잊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온몸을 달구는 뜨거운 분노를 안고 민중의 자유를 위해, 조국의 해방을 위해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고국에 오자마자 나에게 일어난 감정의 소용돌이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미 내 심장과 열정을 아나키즘의 제단에 바치고 목숨을 버리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내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여자에게 너무 잔혹한 일입니다. 나는 그렇게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당신을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때 당신을 명월관에서 데리고 나오지 않았어도 아마 당신은 지금쯤 현재의 이본느를 능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내면의 힘은 저 같은 옹졸한 사내가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지금 단발머리 아래 드러난 당신의 가는 목덜미에 제 손을 얹고 싶습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당신을 끌어당기고 싶습니다.
제 가슴팍에 당신의 어깨를 품고 싶습니다. 가면처럼 두껍게 그린 화장을 지우고 당신 본연의 맑은 눈에 입을 맞추고 싶습니다. 당신의 동그란 뺨에 제 거친 뺨을 대고 싶습니다.
당신이 웃습니다. 저를 보고 웃는 것인지 아니면 제 곁에 있는 어떤 자를 보고 웃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웃음을 부여잡고 백일몽을 꿉니다. 인사동에 작은 기와집을 얻어 살림을 차린다면 어떠할까요. 저는 은행의 말단 사원으로 취직해 월급쟁이가 됩니다.
당신은 온 종일 저만 기다리는 여성은 아닙니다. 당신은 아마도 여류 소설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들어갈 시간이면 집안에는 고소한 밥 냄새며 갖은양념이 내뿜는 음식 냄새가 가득할 것입니다. 우린 마주 보고 음식을 먹으며 당신과 나의 하루를 이야기합니다.
우린 돈 많은 아버지는 절대 가져보지 못한 다정함으로 집안을 치장하고 앞으로 낳을 아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우린 그렇게 둘이 누우면 꽉 차는 방안에 나란히 누워 발장난을 칠 것입니다. 유리창 밖으로 바람이 거세어도 눈이 내려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채 서로를 보듬고 아득한 밤을 보낼 것입니다.
그렇게 나이 들어가며 아이들이 늘어나고 집을 늘리고 머리가 하얗게 변하도록 당신과 살고 싶습니다. 그때도 당신은 여전히 고운 목소리로 나를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겠지요?
유성기판이 멈추었습니다. 왈츠 음악이 그치고 문이 열립니다. 누군가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조신의 꿈은 끝났습니다. 저도 조신처럼 당신과 한평생을 살아낸 듯 머리가 하얗게 센 것 같습니다. 백일몽으로 만족합니다.
이 마음 당신에게 들키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부디 아무것도 모르기 바랍니다. 설령 알아도 몰라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이 무사할 것입니다.
머리로는 애초부터 당신을 명월관에서 외면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은 당신을 곁에 두어 심장이 뻐근하도록 기쁩니다. 나 돌아왔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건강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이본느의 살롱이 아니 당신이 위험해지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