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태화관에서 일을 마치고 인력거에 올라타는데 검은 그림자가 옆자리로 뛰어들었다. 놀란 본이가 소리를 지르려는데 그림자의 손바닥이 본이의 입을 막았다. 유성준이었다. 인력거꾼이 뒤를 돌아보자 본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턱짓을 했다. 다급해 보이는 유성준의 몸짓은 틀림없이 쫓기고 있는 눈치였다.
집에 도착한 본이는 인력거꾼인 김 군에게 두 배의 돈을 주었다. 김 군은 처음 홍란에게 갈 때 본이를 데려다주었던 인력거꾼이다. 전문학교에 다니는 고학생으로 지금은 본이의 전속으로 일하고 있다. 입이 무거운 청년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돌아갔다.
“아직도 위험에 처한 사람만 보면 도와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입니다.”
“뭐라고요?”
“실은 제가 이미 인력거꾼에게 두 배의 돈을 주고 미리 계획한 일인데 본이 씨가 또 두 배의 돈을 주었으니 오늘 저 인력거꾼은 횡재도 그런 횡재가 없네요.”
“누구 맘대로 저보고 본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건 말입니다. 저보고 바퀴 달린 것이 사람을 조심해야지 무슨 소리냐고 화를 내던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 마음입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그만 돌아가 주세요. 아니면 권번의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저는 돌려드릴 물건이 있어서 당신을 찾았을 뿐입니다.”
본이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잠시 말을 멈춘 사이 유성준이 품에서 곱게 접은 장옷을 꺼냈다. 잠든 유성준의 방에 놓아두고 왔던 그 장옷이다. 본이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시월이가 튀어나왔다.
“아씨, 추운데 들어오지 않고 뭐 하신데요? 어? 당신은 자전거?”
이제 시치미를 떼어도 소용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허탈해진 본이가 앞장서고 허락도 받지 않은 유성준이 따라 들어왔다.
“이 양반 좀 보게. 누구 허락받고 따라 들어와요?”
“이 처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목소리가 크구먼. 더 소리 질러야 검은 나비의 집에 외간남자 들어왔다고 소문이 나지. 안 그런가?”
유성준은 시월이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이미 본이의 방 안까지 따라 들어와 있었다. 본이는 무엇엔가 홀린 듯 가면을 벗고 그와 마주 앉았다.
“그렇게 애타게 찾으시던 가방은 돌려받으셨겠지요?”
“덕분에 잘 찾았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보니 너무 쉽게 아무나 도와주시는 것 같습니다. 험한 경성 바닥에서 그렇게 행동하시면 큰일 납니다.”
본이는 아무나가 아닌 당신이었기에 도와준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유성준은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검은 나비가 되었는가에 대해 묻고 싶었다. 하고 싶은 대답도 묻고 싶은 말도 삼켜지는 틈을 시월이가 끼어들었다. 아마도 제 딴에는 낯선 경성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꽤 반가운 모양이었다.
“여관에서 짐을 풀고 돈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어요. 날은 춥지, 배는 고프지 밖에는 거친 사내들이 득실거리는데 뜨끈한 여관 방바닥에 누워 있다가 돈을 찾으니 없는 거예요. 아휴, 선생님은 진짜 절대 그 기분 모르실 거예요. 아씨랑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유성준은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한없이 길어지던 시월이의 이야기가 잠시 중단되었을 때 유성준은 지금까지 장난스럽던 표정을 거두고 목소리를 깔았다.
“실은 김석중 선생님의 제안이 있어서 왔습니다. 잠시…….”
유성준이 말끝을 흐리자 본이는 시월이를 내보냈다.
“김석중 선생님께서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탁월한 것으로 유명하십니다. 그런 분께서 검은 나비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십니다. 지금까지 선생께서 신뢰한 사람이 실망하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선생님은 검은 나비가 권번에서 나와 따로 살롱을 하나 열기를 희망하십니다. 절대 본이 씨를 위험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건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이 요릿집보다는 조금 더 문화적인 공간에서 자유로운 토론에 장을 가졌으면 하십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이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리둥절했다. 김석중 선생이 그렇게까지 자신을 신뢰한다는 사실에 놀라울뿐더러 살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리둥절합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결정만 하신다면 저희가 비용은 전액 부담할 것입니다. 속히 마음 정해서 여기 주소로 연락 주십시오.”
본이는 자기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석중 선생의 제안은 뜻밖이었지만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경성의 살롱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이었다. 그런데 전혀 가슴이 뛰지 않았다.
유성준은 오직 공적인 일로만 찾아온 듯 사적인 감정은 전혀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하기야 울고 있는 그녀의 손 한번 잡아 준 일, 뺨 한 번 쓰다듬어 준 일이 무슨 대수겠는가. 그럼에도 본이는 유성준의 태도에 가슴 한구석이 허물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묻고 있었다. 당신은 한 번도 나를 생각한 적 없는 사람 같다고. 당신은 오직 김석중 선생의 일로만 나를 찾은 것인지 묻고 있었다. 유성준은 그런 본이를 와락 안아 버리고 싶었다. 으스러지게 껴안고 터질듯 두근대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내 얼마나 당신을 찾고 싶었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편지 한 장 달랑 써놓고 떠난 여인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마법처럼 서로의 마음을 느끼던 그 순간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대했다. 그녀도 자신을 찾고 있지는 않을까.
유성준은 지금 그녀가 말로하지 않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 또한 자신의 마음과 같음을. 지금 그녀가 눈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진실임을. 그럼에도 그는 그 마음을 애써 못 본 척 외면하고 돌아섰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