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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버지와의 거래

재회

by 은예진

본이는 유성준이 두고 간 초록색 장옷을 펼쳐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장옷에서는 본이가 사용할 때와 다른 냄새가 났다. 마른 풀냄새 같기도 하고 묵은 종이 냄새 같기도 한 으늑하고 고요한 느낌을 주는 바로 그 유성준의 냄새였다.


그는 이걸 그동안 죽 간직하고 있었다. 그냥 간직한 것이 아니라 그의 냄새가 깊이 배이도록 가지고 있었다.

유성준은 장연수에게 가방을 받자마자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갔었다. 가방을 보관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었기에 들렀지만 아버지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언제인데 이제야 들렸느냐고 호통만 칠뿐이었다.


성준 또한 반가워하지도 않는 아버지를 찾아와 보았자 뭐하느냐고 빈정거렸다. 짧은 만남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유성준이 졸업 사진이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 그나마 어머니 덕분에 그의 방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액자 뒤쪽에 파놓은 홈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사용하던 비밀 공간이다. 그는 홈 속에 가방을 집어넣고 다시 종이를 붙였다. 누구도 유철호 회장 집에 폭탄이 숨겨져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폭탄을 숨겨놓고 돌아서는 유성준의 앞에서 어머니는 눈물을 보였다. 내가 친어미가 아니라 네가 늘 떠도는 것이 아닐까 두렵다고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붙들어지지 않는 네 마음을 도무지 읽을 수 없다며 흐느꼈다.


유성준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야기를 꺼내고 나면 중단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입을 꾹 다물고 돌아섰었다.



가방을 찾을 때가 되었다. 김석중 선생이나 본이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과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처럼 아버지의 집은 화려한 불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둠의 그림자 따위는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과시하듯 대낮처럼 밝은 전깃불이 대문에서부터 환하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사나운 개들이 짖어댄다.


유성준은 이 집에 들어설 때마다 아버지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얼마나 두렵기에 이토록 환한 불빛과 개들로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그의 두려움은 강렬한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다. 유성준은 돈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아버지의 삶을 경멸했지만 이런 광경 앞에 서면 측은하기조차 했다.


일본에서 돌아왔다며 들른 이후로 몇 달 만에 나타난 아들을 보는 유철호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혹시 밀정이라도 달고 온 것은 아닐까 싶어 집사에게 집주변을 살피라는 당부까지 했다.


“네가 어쩐 일이냐? 너 요즘 김석중인가 하는 영감하고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영감 요주의 인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분하고는 요릿집 두어 번 같이 간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김석중 선생이 검은 나비를 칭찬하자 누군가 살롱 이야기를 꺼냈었다. 그걸 낚아챈 것이 유성준이다. 중요한 가방을 본이 덕분에 찾을 수 있었으니 그 신세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 유성준이 스스로 만든 마음속의 변명이었다.


아픈 자신을 보살피고 장연수에게 편지까지 써준 본이에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갚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금전 문제에는 밝지 못한 김석중 선생은 본이에게 살롱을 차리도록 권유하는 것에서 비용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본이가 차릴 수 있을 테지, 하는 정도였다.


유성준은 호남부호의 아들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핏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상황을 계산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본이가 살롱을 차리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큰돈이 필요하다.


애초에 그 돈은 아버지의 둘째 부인에게서 얻어낼 생각이었다. 다시는 아버지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각서 하나쯤 써주면 얼마든지 나올 돈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왜 그런 약속까지 해가면서 본이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가 묻는다면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본이에게 신세 진 것이 있다고 대답하기에는 좀 구차스러워 보였다.


솔직하게 본이가 술자리에 불려 다니는 것이 싫었다. 왜 싫으냐고 또 묻는다면 꼭 대답해야 하느냐고 주먹을 날릴지도 모른다.


아버지 앞에 서자 갑작스럽게 마음이 바뀌었다. 무언가를 내주어야 한다면 둘째 부인과 하는 계약보다는 아버지와 하는 계약이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돈이 필요합니다.”

“오호라, 살다 보니 네가 나한테 돈을 부탁하는 날이 다 있구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 될 것입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돈을 주면 너는 나한테 무엇을 주겠느냐? 알다시피 나는 장사꾼이고 그건 누구보다 네가 잘 알 것이다. 내 주머니에서 공짜로 돈이 나가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무얼 원하십니까?”

“결혼!”

“네?”


“우리 집안이 원하는 상대와 네가 결혼하는 것을 원한다. 그 결혼은 곧 너를 붙잡아 둘 수 있는 끈이 될 수 있다고 믿거든. 어떠냐? 거래할 만하냐?”


어차피 가방 안에 있는 폭탄을 사용하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기에 본이에게 살롱을 차려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겠습니다. 결혼. 대신 시간을 좀 넉넉하게 잡아 주십시오. 당장은 어려우니 일 년 안에는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대답 한번 시원하게 하는구나. 아무래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하여튼 결혼하기로 약속했으면 차용증과 각서를 쓰자.”


유성준은 역시 아버지라는 생각에 혀를 내둘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이 쉽게 진행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필요한 만큼 돈을 내주기로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유성준이 가방을 챙기기 위해 방에 들어가자 어머니가 따라 들어왔다.


“무슨 생각인 거니?”


어머니의 눈동자는 근심 때문에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아버지는 너를 돈으로 잡았다고 좋아하시지만 그게 아닌 것을 나는 안다. 너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아버지와 그런 약속을 한 거니? 네가 아버지가 원하는 결혼을 할리가 없어. 제발 성준아.”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저는 그저 돈이 절실하게 필요해서 아버지랑 계약한 것뿐이에요. 어차피 결혼은 해야 하잖아요. 제가 설마 총각 귀신으로 혼자 늙어 죽겠어요?”


“아니야, 아니야. 이건 아니야!”


유성준은 고개를 흔드는 어머니를 진정시키느라 가슴을 벌려 안았다. 어머니의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이 유성준의 몸에까지 전해졌다. 그의 어머니는 유성준이 기억하지 못하던 어린 날, 작은 소년을 품에 안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가 유모의 손을 놓고 걷다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생긋 웃었다. 낯도 가리지 않고 그녀의 품에 넉살 좋게 안겨 놀다 잠이 들었다. 그 순간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어머니를 가슴에 안은 유성준은 이렇게 가슴 아픈 일 절대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을 새삼스럽게 되새겼다. 제 죽음에 눈물 흘릴 여자는 어머니 한 명으로 족하다는 것. 절대 본이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자신을 채근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본이의 모습이 그의 숨구멍으로 그의 손끝으로 그의 눈 속으로 스멀대며 밀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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