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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지 못하는 남자

재회

by 은예진

필담은 짧게 끝났고 곧 종이 타는 냄새가 났다. 선생은 본이의 손을 잡고 고맙다며 눈을 맞추었다.

“선생님, 저를 너무 쉽게 신뢰하시는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됩니다.”


본이가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하자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나는 자네가 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이 서운하네.”


선생의 마음을 눈치챈 본이는 여러 말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유성준을 만난 것만 해도 가슴이 터질 듯한 일인데 더불어 선생의 신뢰까지 얻었다.


인력거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 본이의 팔을 누군가 뒤에서 낚아챘다. 놀란 본이가 뒤돌아서자 거기 유성준이 있었다. 본이는 아차 싶었다. 그는 절대 자신을 몰라볼 것이라고 여겨서 조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저를 모르십니까?”

“왜 모르겠습니까? 김석중 선생님과 같이 계셨던 분인데요.”

“그전에 저를 만난 적 있지 않으세요?”


“글쎄요…….”


“이천의 성빈관에서 저를 보살펴 주시던 이본이라는 분 아니세요?”


“사람 잘못 보신 모양이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본이는 서둘러 인력거에 올라탔다. 당황한 탓에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다. 유성준이 재빨리 달려들어 겨드랑이를 잡았다.


“전에는 당신이 잡아 주었지만 이번에는 제가 잡아주어야겠군요.”


유성준이 그 말을 했을 때 본이는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인력거꾼에게 어서 가자는 말만 반복했다. 목적지도 이야기하지 않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손님 때문에 당황한 인력거꾼은 무조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본이는 명월관이 멀어지고 유성준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방골 집으로 가자고 했다. 태화관에는 아직 본이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이 있지만 본이는 도저히 술자리에 나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집에 들어서자 시월이가 행수의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우리 아씨를 이렇게 돌려대니 병이 나지 않고 배기겠냐며 내일부터는 일을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고 씩씩댔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자리에 누운 본이는 귀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가슴이 뻐근해졌다. 시월이 말마따나 병이 나지 않고는 이렇게 가슴이 아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혹시 유성준이라는 분을 아세요?”


본이가 아파서 누워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던 홍란이 유성준이라는 말을 듣자 피식 웃었다.


“아프다는 것이 남자 이름부터 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네가 상사병인 모양이다.”

“형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본이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열이 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지는 본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네가 책을 많이 읽어 똑똑한 척은 다 한다만 실제로는 숙맥이구나. 우리 기생들 사이에 어떤 표어가 있는 줄 아느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부지런히 돈 모으자’이니라. 지금 네 인기가 하늘을 찔러서 너에게 사랑을 속살거리는 남자가 얼마나 많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속삭임에 절대 귀 기울이면 안 된다. 그건 다 헛것이요 오래가지 못한다. 세상에 기생에 대한 남자 마음처럼 가벼운 것이 있는 줄 아느냐? 어쩌면 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봄이 가고 꽃이 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은 끝이 있고 네 인기 또한 그러할 것이다. 기생이 연애에 빠지면 결국 소향이처럼 되는 것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오만일 수 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제 질문에 답은 주셔야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시월이가 깜짝 놀라 끼어들었다.


“아씨, 유성준이라면 그 자전거? 요릿집에서 만나셨어요? 잘됐다! 그럼 그때 우리가 낸 약값이며 방값 받을 수 있겠네요?”


“시월아, 우리 지금 그런 돈 아쉽지 않게 벌고 있단다.”


“아씨, 그래도 받아야 할 건 받아야지요. 홍란 아씨 말씀 못 들으셨어요? 인기는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는데 한 푼이라도 챙겨야지요.”


“유성준? 유성준이라 하면 호남부자 대일 은행 유철호 회장님의 아들이구나. 유철호 회장님은 내 단골손님인데 그 양반이 아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소리를 곧잘 했지. 일본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네가 어찌 아느냐?”


“그럼, 그렇게 부잣집 아들이 우리 돈을 떼어먹은 거예요?”

“시월아, 우리가 떠났지 그분이 떼어먹은 것이 아니잖아.”


그제야 시월이가 기억났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눈치챈 홍란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본이는 유성준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그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와 친분이 있고 어디서 공부했는지는 알게 되었지만 정작 그가 어떤 사람인 줄은 모르고 있다.


그저 성격이 조금 급해서 강물에 빠졌을 때 화부터 내고 봤던 인물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지 못한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 대해서 왜 자꾸 생각하는 것인지 본이 자신도 알지 못할 일이라고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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