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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뜻밖의 그러나 기대하던

재회

by 은예진

“검은 나비의 날갯짓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대정 권번에서는 소설이라는 네 기명도 본이라는 네 본명도 다 쓸모없게 되었다. 너는 이제 그냥 검은 나비다. 그 가면은 너를 너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진짜 너를 드러나게 해주기도 할 것이다.”


본이는 행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검은 나비의 등장에 열광하는데 그 검은 나비는 가면을 쓰지 않은 본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검은 나비가 하는 이야기를 본이가 가서 한다면 사람들은 아무도 듣지 않을 기세였다. 그럼에도 검은 나비는 본이였다. 검은 나비가 인기를 얻으면서 여기저기 다른 권번에서도 비슷한 가면을 쓴 검은 나비를 등장시켰지만 술자리에서 망신만 당하고 말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석중 선생은 본인의 술자리에 기생을 직접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기생을 불렀을 때 마다치 않았고 다른 사람이 기생을 불러 술을 마셨다는 소리를 들어도 화내지 않았다. 그런 선생이 대정 권번에 검은 나비를 보내달라는 연락을 해왔다.


깜짝 놀란 행수가 다른 약속을 모두 취소시키고 본이를 명월관으로 보냈다. 선생이 아끼는 청년들을 초대한 자리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검은 나비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 부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검은 나비가 읽은 책을 자신도 읽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부르기도 했다.


심지어 고민을 털어놓을 자리가 마땅히 없었는데 검은 나비라면 자신의 고민에 대한 답을 알려줄 것만 같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은 무슨 이유로 아끼는 청년들이 모인 자리에 검은 나비를 부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본이는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서양식 복장을 하고 다녔다.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비로드 원피스에 털 코트를 입고 나비 가면을 쓴 그녀를 보고 예전의 본이를 연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선생이 있는 명월관 국화실에 들어선 본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숨을 죽였다. 그 바쁜 와중에도 이런 날이 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루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술자리에 처음 들어가서 인사를 할 때면 습관처럼 어떤 얼굴을 찾았다.


만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도 했다. 여관 마루에서 그녀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던 남자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 순간 시월이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그는 무엇을 하려던 것일까. 혹시라도 한순간 스쳐간 이본이라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걸 확인하느니 차라리 영원히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온갖 상념을 만들어내던 남자가 현실이 되어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를 둘러싼 공기가 점차 바뀌고 시간이 뒤틀리고 발밑이 갈라져 알 수 없는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가 거기 있었다. 백번도 천 번도 더 되뇌어 이름마저 닳아버린 남자. 유성준.


본이는 그가 절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전 모습 그대로 만나도 그는 본이를 기억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다 사고로 만나 신세 진 여자 따위는 기억에 남을 이유조차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어찌 알아보겠는가 싶었다. 그러자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자, 인사들 하시게. 여기는 검은 나비라고 요즘 한창 경성의 화젯거리인 대정 권번 소속의 이야기 기생이라네. 아주 멋진 친구야. 나는 이 친구 덕분에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제법 많이 깨달았지. 나는 우리 젊은 친구들이 앞으로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려면 검은 나비의 지도가 필요할 것 같아서 불렀다네.”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저희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들인데 일개 기생에게 배우라고 하시는 겁니까?”


선생은 질문한 청년이 있는 쪽을 쏘아보더니 본이에게 술을 한잔 청해 마셨다.


“어허, 자네가 나보다 나은 모양일세. 나는 이 친구에게 많이 배웠는데 자네는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니.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배울 게 있어도 배울 수 없는 법이지.”


질문했던 청년이 민망해하는 것을 보고 본이가 재빨리 나섰다.


“선생님, 말씀이 과하십니다. 저는 그저 술자리 흥이나 돋우는 기생에 불과합니다.”


본이가 입을 떼는 순간 유성준이 눈썹을 추어올렸다. 선생과 본이가 최근 읽은 책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어느 사이 청년들이 끼어들어 그에 대해 찬성을 하기도 하고 반론을 펼치기도 했다. 가벼운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유성준은 그 가벼운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본이는 경성에서 유성준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수 있었지만 유성준으로서는 절대 본이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기생의 목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아니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던 여자라는 사실에 유성준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선생이 본이를 불러 귓속말을 했다. 본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들을 등지고 방문 앞에 섰다. 선생은 종이를 꺼내 청년들과 필담을 시작했다. 그제야 본이는 선생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깨달았다.


선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검은 나비를 부른 것이다. 본이는 문을 바라보고 서서 유성준이 가방 때문에 안달하던 때를 떠올렸다. 강물에 젖은 남자에게서는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체취가 났다. 나중에야 그 냄새가 오래된 서책에서 나는 냄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체취에서부터 본이를 끌어당기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 냄새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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