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 드 경성
이본
드디어 당신이 오셨군요. 당신이 제 앞에 나타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마른 가랑잎들이 가지 끝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고 유리창에 서릿발이 하얗게 얼어붙을 즈음 당신이 이제 시간을 끌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제가 당신이 뜻하던 만큼을 이루었나요?
이본이라는 제 이름을 불란서식인 이본느라 바꾸어 주면서 당신은 말했지요. 할 줄 아는 것은 바느질밖에 없는 묶인 개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구여성의 생활에서 그대와 같은 용기를 가진 사람이 나온 것이 대단하다고요.
그런 칭찬 앞에서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때까지도 날마다 가위에 눌릴 만큼 두려웠습니다. 경성에서의 하루하루가 무서웠습니다. 겉으로는 대범한 척 거침없이 나아갔지만 수면 아래 힘겨운 발놀림을 감추고 우아하게 노니는 백조처럼 실제로는 온 힘을 쥐어짜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제게 이본느의 살롱을 열라는 말과 함께 엄청난 돈을 쥐여 주고 사라졌을 때 수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도대체 무얼 어쩌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제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장연수에게 중요한 물건이 든 가방을 맡겨 두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가방을 맡기려면 일본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 그토록 중요한 가방을 직접 들지 않고 맡겼다는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었으리라는 것 정도만 짐작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당신의 꿈틀거리는 짙은 눈썹 아래로 격동하는 의기 가득한 눈동자를 보면 그 짐작 너머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기가 저에게만 보인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 때때로 두려웠습니다.
당신이 사라지고 나서 얼마 후 종로경찰서 폭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어떤 증거도 없었지만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폭탄이 제대로 터지지 않아 경찰서에 확실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신이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저 또한 상심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에게 왜 살롱을 열도록 했는지에 대해 답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제 신변에 위험이 닥칠 일을 함부로 부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떠나기 전날 밤 제 뺨 가까이 들어 올린 손을 차마 대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뺨과 당신의 손바닥이 닿을 듯 말 듯하던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말로는 다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 마음은 단단한 씨앗을 하나 품었습니다. 당신이 떠난 뒤 그 씨앗이 얼마만큼 자랐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혹여나 흉보지 마세요. 이천에서 여름 내내 땀 흘리며 농사를 지었던 작인들이 자신들의 소출 중 칠 할을 지주인 시댁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지대로 칠 할을 주고 남은 작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조치원에서 마흔 살 넘은 일인에게 팔려간 열댓 살짜리 계집아이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경성에서는 또 다른 삶이 펼쳐지더군요. 요릿집에서 흥청망청 돈을 뿌리는 이들의 삶은 어떠한지 교양인입네 떠드는 살롱의 속물 손님들은 어떠한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 생각이 주제넘은 일인 줄 압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품게 한 것은 당신이 차마 다 말하지 못하던 순간에 제게 다가온 그 어떤 것 때문입니다. 나라를 팔아 제 뱃속을 채운 자들과 곤궁한 백성들의 삶을 외면하는 이들을 일깨우는데 살롱이 쓰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웃고 있는 당신, 제 말이 들리나요?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당신 제 말이 들리나요? 들린다면 당신이 감추고 있는 이야기를 저에게만은 들려주세요. 당신은 그냥 호남 제일의 갑부집 아들 유성준일뿐인가요? 그래서 우연히 알게 된 구여성이 경성에서 홀로 되어 애쓰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도와준 것뿐인가요?
내가 짐작하고 있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어느 날은 당신의 정체에 대해 확신했다가도 자고 나면 다시 안갯속처럼 흐릿해져 혼란스럽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날마다 흔들립니다. 당신에 대한 내 마음 또한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살롱을 열고 그 살롱을 경성 지식인들의 놀이터로 만들며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했습니다.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보게 된 세상, 제가 얻게 된 생각들은 당신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걸 부끄럽게 여기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오늘 제게 가장 큰 선물로 돌아왔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망설이지 말고 당신이 뜻하는 곳에 이본느의 살롱이 같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