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 드 경성
홍정순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누구를 통해야 그들의 근황을 알아볼 수 있을까 싶어 궁리하던 차에 이종필이 찾아왔다. 이종필은 민영식과 가장 친분이 많은 화가였다. 덕분에 총독부 건물에 이종필의 그림이 몇 점 걸려 있다.
“민 군이 습격을 당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 아시지요?”
“네,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저 그래서 말인데 민 군이 이본느가 한 번만 병문안을 와주신다면 당장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사정하는데 어떻게 가 주실 수 없을까요?”
본이가 기다렸다는 듯 알겠다고 하자 이종필이 도리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몰랐을 것이다.
병원에는 경비가 삼엄했다. 병원 앞에서 한 번 병실 앞에서 다시 한 번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쳤다. 이종필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병실에는 민영식이 없었다. 현직 경무국장의 양아들이라는 위세는 대단해서 주인 없는 병실에는 손에 무언가를 하나씩 들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키가 작고 얼굴색이 유난스럽게 누르스름한 여자가 이종필을 보더니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제수씨, 민 군은 어디 갔나요?”
“네, 유 선생님 병실에 갔습니다. 유 선생님이 어깨 수술을 마치고 난 터라 가봐야 할 것 같다고요. 생명의 은인이신 분이니 찾아뵈어야지요.”
“그럼 우리도 유 군 병실로 가야겠네요. 다시 들르겠습니다.”
병실을 나온 이종필이 유 군 병실이 원래 더 조용하고 좋겠다며 민망한 듯 웃었다.
“저분이 민영식 씨 처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안 되었지 뭐예요. 황달 끼가 있다고 하던데 혼마치 경무국장 집의 하녀나 다름없이 집안일을 모두 떠맡아서 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봐요. 혼마치 입장에서는 사이토 총독이 양아들을 들이라고 하니까 들여놓은 것이지만 뭐 양아들에게 얼마나 정이 있겠어요. 그래도 어찌 되었든 민 군은 권력의 중심부와 직접 연이 닿으니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살지만 그 처 입장에서는 말 못할 고충이 한둘이 아닐 거예요.”
“저를 데리고 민영식 씨 병실에 들어가면 당연히 그분 앞에 서야 하는 건데 이런 심부름하시기 미안하지 않으셨어요?”
이종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쉬더니 본이를 향해 돌아섰다.
“민 군의 처에게 미안했으면 일본이 우리를 통치해서 다행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한테 붙어먹겠습니까? 어차피 나는 부끄러운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 막막한 시절에 부끄러움을 가졌으면 어떻게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수치심 같은 것은 똥간에다 밑을 닦아 버린 지 오래입니다.”
본이는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종필이 당당하게 부끄럽지 않다고 하는 대답은 도리어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라고 들렸기 때문이다.
유성준의 병실 문을 두드리자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사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문을 열었다. 번쩍거리는 금반지를 낀 것도 아니고 요란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닌데 여자에게서는 평생 일할 필요가 없었던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결이 있었다.
그 결은 한두 해의 생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흉내 내기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여자는 자신을 성준의 어머니라고 소개했다. 본이는 허리 굽혀 인사하면서 여자의 얼굴에 성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에 궁금증이 일었다.
두 사람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유성준의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민영식이 요란하게 팔을 벌리며 환영인사를 했다. 과장되게 이종필을 껴안고 다시 팔을 벌려 본이에게 달려드는 것을 본이가 살짝 뒷걸음질해서 비켜났다.
머쓱해진 민영식은 유성준이 어떻게 자신을 구했는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유성준이 뒷다리 차기로 복면 괴한의 칼을 걷어차던 상황을 침 튀겨가며 떠든다. 유성준이 그렇게 괴한과 싸우는 동안 자신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그러니 다친 곳이 없을 것이다.
본이는 민영식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유성준을 흘끔거렸다. 그는 본이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작정한 듯 눈을 감고 있거나 가끔 붕대로 감싼 어깨를 움켜쥐며 미간을 찡그릴 뿐이었다.
민영식은 자신의 아버지 혼마치 경무국장이 유성준에게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할지 몰라 고민 중이라며 연신 유성준을 추켜세웠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민영식의 말을 끊은 것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이닥친 유철호 회장 때문이었다. 유철호 회장은 마치 중년이 된 유성준을 보는 것만 같았다.
단호한 입매와 굵은 눈썹, 결기가 느껴지는 눈동자는 부자지간이 사이좋게 하나를 나누어 가진 것만 같았다. 그는 병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듯 거침없이 유성준 앞에서 서서 자기 할 말만 했다.
“도대체 너란 녀석은 어떻게 되어 먹은 거냐? 이제 하다 하다 칼까지 맞고 돌아다녀? 그래도 네가 불령선인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다친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와본 것이다. 혼마치 경무국장이 직접 내게 전화를 했더라. 회장님의 영식이 자기 아들을 구했으니 이런 고마울 때가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넌 우리 집안 장손이야!”
“아버지, 제가 언제부터 우리 집안 장손 대접을 받았습니까?”
얼굴색이 하얗게 변한 유성준의 어머니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넌 언제나 우리 집안 장손이었어! 아버지가 표현을 안 하셔서 그렇지 네 걱정을 얼마나 하신 줄 아니?”
“필요 없는 말 떠들지 마시오. 넌 이참에 은행 일을 봐야겠다. 당국에서 네게 호의를 보여줄 때 이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 하고 있어야지. 그리고 이제 약속을 지켜야지. 당신이 지난번에 만나본 그 아가씨랑 어서 혼사를 서두르도록 하시오. 이 녀석이 처자식이 있어야 칼을 맞고 다니는 위험한 짓을 하지 않지.”
“아버지!”
“뭐가 아버지냐? 네가 각서 쓰면서 한 약속 아니냐. 작년에 원하는 돈을 주면 내가 결혼하라는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 뭐가 불만이야? 나는 아무리 자식이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한다. 나는 그 각서 공증까지 해 놓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시에는 열 배의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걸 물든지 아니면 내게 고소를 당하든지 맘대로 해라.”
“여보, 여기 손님들도 있는데 너무 말이 과하십니다.”
“과하기는 뭐가 과한가. 나는 사업하는 사람이오. 사업하는 사람에게 신용은 생명이요.”
유철호 회장은 그제야 병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둘러보더니 민영식에게만 묵례를 하고 나간다. 문을 막 열고 발을 떼던 유철호 회장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리더니 본이를 한 번 쏘아보고 나갔다.
본이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느라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이본느의 살롱을 열도록 유성준이 준 돈이 그런 각서를 쓰고 준 돈이라는 말인가. 본이는 유성준이 돈을 쥐어주며 자신에게 이정도 능력은 충분히 있다고 말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