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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미안하다는 말

살롱 드 경성

by 은예진

본이에게 살롱을 차리라는 말과 함께 거액의 돈을 안겨주고 떠났던 유성준은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에 선물처럼 나타났다. 끝내 발길을 돌리지 못한 유성준은 눈 속에 서 있었고 이제 이본느가 된 그녀는 유성준을 보내지 않았다.


밤은 짧기도 하고 길기도 했다. 혼란스럽기도 하고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그의 팔을 베고 눈을 감은 채 어떤 신을 향한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기원했다. 부디 이 남자 곁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아니 이 남자가 이곳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말이다. 소망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행복하고 나른한 아침이었다. 본이의 손은 더듬더듬 성준의 몸을 찾았다. 눈도 뜨지 않고 성준을 찾던 본이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본이는 자신이 꿈을 꾼 것일까 싶어 화들짝 놀랐다. 이불이 젖혀지고 자신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난밤의 일은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준은 그녀와 아침을 맞이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그들의 관계에 대해 어떤 언질도 주지 않은 채 그렇게 떠나 버렸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한 것인지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렇게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본이가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그가 누웠던 자리로 파고들자 남아있는 그의 체취가 코 끝에 느껴졌다. 지난밤 성준은 본이의 몸을 으스러지게 껴안고 귓가에 나지막이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본이였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제가 원해서 당신 품에 안긴 것인데 어째서 미안하다는 말을 이리 하느냐고 묻자 그의 눈이 너무 슬퍼 보였다. 그는 이렇게 떠나야 하기에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듣고 싶은 말은 더 많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도 들을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시월이가 들여온 신문을 펼쳐 든 본이의 손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혼마치 경무국장 양자 피습 사건이라는 제목과 함께 실린 사진에는 민영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성준도 같이 있었다.


기사의 제목은 민영식 피습인데 다친 사람은 유성준으로 보였다. 유성준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민영식을 적신 것이지 민영식이 다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본이는 다급하게 사진 아래에 있는 기사를 읽어 나갔다.


소화 2년 1월 3일 새벽, 귀가 중이던 민영식 군이 남대문 인근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동행하고 있던 유성준 군이 결투를 벌이는 바람에 민영식 군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유성준 군은 어깨에 칼을 맞고 경성 의과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다.


당국에서는 민영식 군이 혼마치 경무국장의 양자임을 알고 피습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경무국에서는 모든 경찰력을 동원해 범인 색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범인은 도망가면서 일제의 개 노릇을 하는 민영식은 각성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사진 속에 유성준은 어깨의 통증이 심한 듯 움켜쥐고 있었다. 본이는 왜 유성준이 하필이면 민영식 같은 인물을 구하기 위해 칼을 맞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눈을 잔뜩 맞고 들어와 시위하듯 꼼짝 않고 서서 물을 흘리고 있던 민영식에게 수건을 가져다주고 위스키 잔을 건네준 사람도 유성준이었다.

본이 앞에서 사람들은 민영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일전에 민영식이 많은 사람 앞에서 너 따위를 첩으로 삼지 못하면 내가 민영식이 아니라며 술주정을 하다 본이에게 뺨을 맞았다. 그런 터이니 다른 곳도 아닌 살롱 안에서 민영식에게 호의를 베풀려면 본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주춤거릴 때 유성준이 나서서 민영식을 끌어다 자기 옆에 앉히고 사람들 틈에 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본이는 유성준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남자들의 속내는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훤히 보이는데 유독 유성준의 속내는 안개 낀 숲길을 헤매는 것처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는 얼마나 다친 것일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은 아닐까. 병원엘 가보려면 핑계가 있어야 하는데 홍정순에게라도 연락해봐야 할까.


본이는 생각에 몰두하느라 자신이 손톱을 깨물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손톱 끝을 물어뜯어 뱉어낸 자리에 시월이의 발이 보였다. 고개를 들자 시월이가 허리에 손을 얹고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뭔 짓이래요? 안 하던 버릇이 또 나왔네. 아씨가 이제 손톱 안 물어뜯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이 엊그제인데 내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또 손톱을 물어뜯네! 아주 헝겊으로 똘똘 감아서 싸매 놓든지 어린애들처럼 아까징끼를 발라 놓든지 해야지 원.”


“시월아, 오늘 신문에 그분이 다쳤다는 기사가 났다.”

“그분이라니요? 누구요?”


“유 선생님이 어깨에 칼을 맞아서 병원에 있다네.”

“네? 정말요?”


시월이가 눈이 둥그레져서 신문에 달려들었다.


“에구머니나 이게 누구야? 그 나쁜 놈을 대신해서 칼을 맞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래요? 이거 정말 유 선생님이 맞는 거예요?”


“그러게 말이다.”


본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용한 무당도 제 팔자는 알 수 없는 것처럼 본이가 아무리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판단을 잘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이 쏠려 있는 남자의 속내와 관련된 일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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