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 드 경성
기회만 오기 기다리던 그들에게 드디어 때가 온 것은 종친 간에 일어난 땅 분쟁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종친 땅을 무단으로 사용한다며 항의하는 문중 어른들을 설득하느라 종손의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했다.
최 집사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며칠째 집을 비우고 있었다. 다시는 올 수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장연수는 애초에 그릇이 작은 인간인 데다 아무리 생각해도 땅문서를 빼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가 시간을 끌며 미적거리는 것을 눈치챈 윤미령이 용기를 내기 위해 술을 한잔 마시고 할 것을 권했다. 온몸이 뻣뻣하게 긴장돼 있던 장연수는 술 한 잔에 눈이 풀렸다. 꾸벅거리고 졸면서 어떻게 이렇게 쉽게 취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윤미령은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재빨리 사랑방에 들어갔다. 어슴푸레한 윤곽이 잡혔다. 땅문서는 찾기 쉽지만 생각하기 어려운 장소에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병풍이나 족자 뒤쪽 벽을 뒤져보았지만 없었다. 보료도 들추어 보았지만 마땅히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때 귀퉁이에 장식처럼 꽂혀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기 열전, 책략 같은 책으로 기억했다. 시아버지가 책을 읽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윤미령을 책을 펼쳐 들었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겉장과 내용이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윤미령은 닥치는 대로 책을 품에 안고 방을 빠져나왔다. 땅을 팔거나 할 겨를은 없을 것이다. 그저 맡기고 돈을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빠른 시간 안에 마을을 떠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해 놓았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이웃에 돈을 주어 말을 한 마리 키우고 있었다. 그건 장연수도 모르던 일이다. 말이 있는 집까지만 가면 일단 안심이었다. 몇 달 안에 끝내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다. 장연수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시키기만 하면 아버지 땅문서를 훔쳐다 바칠 줄 알았는데 뜻밖에 몸을 많이 사렸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대문을 빠져나와 길모퉁이를 돌았다. 마구간이 있는 집의 주인은 잠든 모양이었다. 마구간은 어둠에 잠겨있어서 겨우 말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말은 숨을 고르게 내쉬며 졸고 있다.
미령이 말의 목덜미를 쥐자 깜짝 놀라 힝힝거린다. 그녀는 안장을 찾기 위해 눈에 힘을 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손이 튀어나와 마구간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미령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씨, 제가 일본에서 돌아온 재무국장 따님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놀란 윤미령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최 집사가 실쭉 웃으며 그녀의 엉덩이를 발로 툭 걷어찼다.
“기생년 주제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윤미령은 급하게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치마를 걷어 올리며 교태를 부렸다. 허연 다리와 그보다 더 뽀얗게 눈이 부신 목덜미가 드러났다. 최 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회를 잡았다고 여긴 윤미령이 어깨에 건 치마끈을 풀어 내렸다. 반쯤 드러났던 가슴이 모두 나왔다.
“최 집사, 우리 같이 갑시다. 내가 들고 나온 것으로 우리 팔자 한번 고쳐봅시다. 이래 봬도 내 치마폭에 들어온 남정네 치고 제 발로 나간 사람이 없다오.”
윤미령이 최 집사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녀가 상체를 움직이자 가슴이 살짝 흔들렸다. 그 흔들림에 최 집사도 덩달아 흔들렸다. 여기서 자신이 마음을 바꿔 먹는다면 정말이지 이 여자의 말대로 다른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뒤에 있는 사람을 해하지 않고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무엇이 어쩌고 어째!”
분노에 찬 오 씨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 찢어 죽일 것이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집사를 유혹해!”
윤미령은 포기한 듯 일어서다 말고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두 사람에게 집어던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달려도 건장한 최 집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발악했다.
윤미령은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최 집사의 손에 붙들려서도 집요하고 악착같이 풀어달라고 애원하다가 욕설을 퍼부어 대는데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도 장연수는 여전히 술인지 약인지 알 수 없는 것에 취해 기분 좋은 잠을 자고 있었다.
장덕순이나 오 씨는 아들이 윤미령에게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아들과 공모한 일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아들이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고 윤미령 혼자 땅문서를 들고나갔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윤미령에게만 모든 죄를 덮어씌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재소에 윤미령을 넘긴 장덕순은 아들을 불러 앉혔다.
“처가에 가서 네 처를 데려와라.”
“네?”
“조치원에 가서 네 처를 데려오라고!”
“아버지! 한 번 내쫓은 여자를 데려오라니요. 쌔고 쌘 것이 여자인데 왜 굳이 그 여자를 데려와요?”
“구관이 명관이니까. 며느리를 세 번씩이나 들이는 것도 남우세스럽다. 네 처가 집안이며 여러 가지로 빠질 것이 없는 아이였다. 네 처는 어떤 사람인 줄 알지만 다른 여자는 또 어떨지 알 수 없잖느냐. 그냥 네 처를 데려와라.”
“싫습니다. 제가 왜 그 여자를 데려오려고 조치원까지 가야 합니까?”
“내가 바보라서 네 죄를 추궁하지 않고 덮는 줄 아느냐? 부끄러운 짓을 했으면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아야지. 진짜 내 자식이지만 한심해서 볼 수가 없구나. 잘 들어라. 네 처를 데려오지 못하면 너는 집안에 한발 짝도 들어오지 못할 줄 알아라. 내가 죽으면 어차피 이 집안 재산 네가 물려받을 테니 나 죽거든 그때나 오너라. 그전에는 들어올 생각일랑 아예 말아라. 어디 땡전 한 푼 없이 나 죽을 때까지 살아 보아라. 여자 꾐에 빠져서 제 아버지 뒤통수나 치려했던 머저리 같은 놈!”
장덕순은 야단치고 오 씨는 다독이며 본이를 데려오라고 했다. 최 집사를 딸려 보내겠다는 말에 펄쩍 뛰며 혼자 가겠다고 했다. 그러잖아도 눈엣가시였는데 윤미령이 도망가기 위해 최 집사 앞에서 옷고름을 풀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최 집사만 보면 살의를 느꼈다.
조치원에 간 장연수는 이수호에게 멱살을 잡히고 이수일에게 뺨을 맞았다. 경주 이씨 익제공파 39대손을 욕보였다며 야단치는 그들도 본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장연수는 본이를 찾겠다는 핑계로 당분간 경성에서 지낼 것을 아버지에게 청했다. 본이를 찾는 시늉만 해도 돈줄을 막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성으로 가는 것이 아주 거짓말은 아닌 것이 이제 본이에 대해 물어볼 만한 사람은 유성준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유성준이 어떻게 본이를 알고 있는 것인지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