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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오이디푸스와 리어왕

살롱 드 경성

by 은예진

의열단 단원들은 이본느의 살롱을 거점 기지로 이용할 것을 강력하게 원했다. 애초에 이본느의 살롱을 구상할 때 그러한 용도를 생각한 것이 아니냐며 반대하는 유성준을 몰아붙였다.


의열단이 독립운동에 아나키즘을 부분적으로 수용했지만 근본적으로 유성준이 속한 흑우회 와는 성격이 달랐다. 아나키스트는 범국가적인 이념단체라서 아이자와 교수 같은 일본인들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던 의열단은 이러한 흑우회의 활동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어떻게 일본인이 낀 독립운동이 가능한지 의심했다.


유성준이 본이에게 살롱 차릴 돈을 넘겨주고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을 때 뒤를 봐준 것이 의열단이었다. 유성준은 흑기연맹이 체포되었던 선례를 생각해서 독자적으로 움직일 것을 결정했다. 의열단은 그러한 유성준이 거사를 도모하고 의심을 받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김석중 선생은 의열단의 정신적 지주였다.


의열단이 민영식을 공격했을 때 유성준이 몸으로 막아 환심을 사기로 했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일본에서 유성준이 요주의 인물이었지만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국내에 들어와서 그가 보인 모습은 어떻게 하면 왕자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킬까 고민하는 왕세자였다.


아버지가 대단한 부자라는 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민영식과 호형호제하게 된 유성준은 총독부 행사에 수시로 초대받았다. 유성준은 최대한 핵심적인 자리까지 들어갔을 때 종로경찰서에서의 실패를 만회할 만한 일을 벌이기로 했다.


“자네가 지나치게 이본느를 싸고도는 것 아닌가 싶네. 이본느만큼 믿을 만한 사람도 없고 더군다나 본인이 원하는 일이야.”


의열단 단원인 홍정순이 이본느 때문에 유성준이 단원들에게 질책당하자 보다 못해 나섰다.


“뭐? 원한다고?”


“그렇다니까. 우리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한테 김석중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돕고 싶다고 했어. 우린 이본느의 도움이 절실한 형편이야. 저들은 점점 달라붙어서 이제 선생님이 어제 무얼 먹었는지 소변을 몇 번 보았는지까지 세고 있어. 이제는 선생님도 만날 수 없고 우리끼리도 극히 조심해야 하는 형편인데 이본느가 나서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자네가 반대해도 우리는 이본느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네.”


유성준은 머릿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마구 긁어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권번에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석중 선생이 살롱 이야기를 할 때는 그저 지식인 청년들의 토론에 장이라고 했지 거점 기지나 그런 의도로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유성준의 표정이 너무 괴로워 보였는지 홍정순이 혀를 찼다.


“자네 혹시 말이야?”


유성준은 그 소리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살롱을 향해 나섰다. 그러한 유성준의 모습을 보면서 홍정순이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쉬었다. 목숨을 내놓기로 서약한 그들에게 여자를 향한 마음은 너무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유성준이 살롱 문을 열었을 때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이본느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청년들을 상대로 오이디푸스는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게 된 자의 비극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리어왕처럼 내가 누구인 줄 몰라서 생긴 비극이 더 비극적인가 아니면 오이디푸스처럼 내가 누구인 줄 알아서 생긴 비극이 더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오늘 이본느에게 걸려든 청년들은 너무 어린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이본느가 몰아대는 대로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내가 누구인 줄 알아서 두 눈을 파낼 수밖에 없었던 오이디푸스도 내가 누구인 줄 몰라서 비참하게 죽어간 리어왕도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유성준이 팔짱을 끼고 이본느를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유성준이 다시 나오는 것을 본 이본느가 재빨리 따라나섰다.


“무슨 말씀인가요?”


“어째서 의열단을 돕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한 거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몰라서 그러나? 도대체 겁이라고는 없는 여자 아닌가?”


“왜 다짜고짜 화부터 내세요? 정작 화를 낼 사람은 저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갈 때도 올 때도 저에게는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그 더러운 민영식 때문에 몸을 다칠 때도 한마디 해주지 않았습니다. 언질 한번 주지 않고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무슨 참견이란 말입니까?”


본이는 내심 자신에게 곁을 주지 않는 남자에 대해 섭섭함이 컸다.


“내가 그걸 왜 당신에게 말해야 하지요?”


“그럼 나는 왜 의열단을 도우면 안 되는 겁니까? 애초에 선생님이 살롱을 열 것을 제의할 때 틀림없이 말씀

하셨습니다. 김석중 선생님이 원하는 바라고요.”


“틀림없이 말했지요. 조선의 청년들이 조금 더 고급스러운 토론의 장을 원한다고요.”


“제가 그 이면에 깔린 의도를 모를 만큼 바보인 줄 아세요? 선생님이 위험한 일은 절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위험한 일 없게 하겠다는 말씀은 즉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살롱이 만약 저 혼자 권번에서 나와 호사스럽게 살 수 있는 수단이 되는 일이었다면 절대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술자리에서 노리개가 되는 한이 있어도 선생님을 제 후원자로 삼아 살롱을 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성준은 화가 났지만 이 싸움에서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이기기 위해서는 당신이 위험해지는 것이 싫다고, 나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안전한 삶을 살아 달라고 사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미 목숨을 내어 놓은 사람이지만 당신은 살아서 조국의 해방과 꽃피는 봄날을 맞이했으면 좋겠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고백은 도리어 그녀를 더 아프게만 만들 뿐이었다. 언제 죽을지 아니 죽으려고 작정한 남자에게 사랑이라니 이보다 더 사치스러운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유성준은 폭탄을 들고 종로경찰서에 들어가던 순간보다 더 두렵고 더 떨렸다. 폭발할 것만 같은 심장을 가눌 길 없는 그는 열을 식히기 위해 셔츠 윗 단추를 풀었다. 쇄골 아래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칼이 꽂혔던 자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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