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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술

살롱 드 경성

by 은예진

본이는 입술을 꽉 깨물고 들어와 독한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깜짝 놀란 학생들이 흘끔거리며 수군거렸다. 살롱은 애초에 상업적 목적보다는 문화 공간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다.

토론이나 회합 뒤에 술을 마시러 다시 나가는 것보다는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좋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술이나 간단한 차를 내오기 시작했는데 그 비중이 점점 높아졌다.


이제는 다른 이유 없이 술 자체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 본이는 될 수 있으면 다른 술집을 이용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자주 오는 청년들에게 야박하게 굴기 어려웠다.


본이가 손님들과 술을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본이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눈치챈 보이가 재빨리 시월이를 불렀다.


본이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시월이가 뛰어와 어미 닭이 병아리 낚아채듯 본이를 끌고 들어갔다. 키는 본이의 어깨 밖에 안 되지만 완력으로는 본이의 두 배는 되는 시월이 손에 잡힌 이상은 뿌리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글쎄, 놔두라고. 나도 술 좀 마셔야겠어!”

“진짜 우리 아씨 사람 미치게 하네. 어서 들어오지 못해요?”

“왜? 왜? 왜 내가 들어가야 하는데? 왜? 당신은 나한테 이렇게 모질게 구는데? 왜?”


시월이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뒤를 돌아보며 두리번거렸다.


“아씨, 나 좀 보세요? 지금 그 말 누구한테 하는 거예요?”


하지만 본이는 그 말을 듣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 베갯잇은 본이의 초록색 장옷으로 만든 것이다. 장옷을 잘라서 베개로 만드는 것을 보고 시월이가 이건 또 무슨 짓이냐며 타박을 했었다.


본이는 장옷에서 나는 그 으늑한 냄새를 맡으면 의지할 사람 없이 자신만을 믿고 나아가야 하는 두려움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그 냄새도 모두 휘발되어서 남은 것은 장옷을 전해주던 날의 기억밖에 없었다.


잠든 본이가 잠꼬대처럼 흐느낀다. 그런 본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월이가 본이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남들 앞에서 강하게 보이고 싶어 언제나 힘을 주고 있는 어깨의 근육이 누워서도 다 풀어지지 못한 듯 단단하다.






동문의 술자리에서 장연수를 만난 유성준은 깜짝 놀랐다. 장연수는 동경에서도 유명했던 윤미령과의 일을 떠벌이고 있었다.


“그 계집의 수완은 알아주어야 한다니까. 이천의 주재소에서도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나가서 평양으로 다시 돌아갔다네. 내가 그 계집한테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는 몰랐는데 정말 갈보도 그런 갈보가 없어. 우리 집 집사 새끼한테까지 추파를 던졌던 년이야.”


“흥, 그래도 윤미령이 다시 부르면 정신 못 차리고 달려갈 거면서.”

“어림없는 소리! 이제 그따위 계집은 잊어버렸다니까.”

“과연 그럴까?”


술잔을 부딪치던 그들이 뒤에 서 있던 유성준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특히 장연수는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누가 보면 어릴 때 헤어진 형님이라도 만났는지 알았을 것이다.


“이게 누구야? 성준이 자네 아닌가? 내가 여길 오면 자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왔더니 생각대로 만나게 되었구먼. 반갑네! 반가워!”


유성준은 자신이 성빈관에 누워있을 때 장연수가 가방을 가지고 찾아온 것은 엄청나게 반가운 일이었지만 장연수가 왜 자신을 만난 것이 이리도 반가운 일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철없는 인간이 정말 아버지 땅문서라도 훔쳐서 나온 것인가 싶었다.


“나도 반갑기는 하네만. 무슨 일 때문에 나를 만나려고 했나?”


“이제 만났으니 그 일은 나중에 이야기해도 될 것 같으이. 우선 술이나 한 잔 마시자고. 노인네들 때문에 시골구석에 너무 오래 처박혀 있었더니 경성 술맛이 아주 달아요! 달아.”


술자리는 끝이 없을 것 마냥 계속되었다. 유성준은 적당히 노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이제 돌아가도 되겠다 싶었다. 장연수는 특별한 용건도 없으면서 공연히 호들갑을 떤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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