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마법을 가진 마법사다
한창 승무원을 준비하던 2007년의 여름.
연일 무더웠던 날씨에도 불구하고 방학 내내 외항사 승무원 면접을 대비한 인터뷰 준비, 토론, 수업 등등 2개월이 넘도록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의 꿈을 향해 부지런히 달리던 시절이었다. 마침 9월에 케세이퍼시픽의 한국 채용이 오픈되었다. 나는 열심히 준비한 만큼 최선을 다해 면접을 보았고 운이 좋게도 두 번의 면접을 모두 통과해 합격했다. 얼마 안 가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신체검사를 하게 되었고, 주변에서는 이제 모두 끝났다며 최종 합격 발표만 기다리면 되니 안심해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를 이유로 두 달 내내 불안에 시달렸고, 결국,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나는 신체검사 이후, 결국 최종적으로 불합격했다.
사실, 세브란스에서 신검을 할 때 혈압이 계속해서 높게 나오는 바람에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동네에 있던 병원에서 다시 혈압을 재서 세브란스로 보냈는데 케세이퍼시픽 측에서 공식자료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대학교 4학년 2학기였던 나는 9월 케세이퍼시픽 면접 합격 이후 아무런 취업준비도 하지 않았기에 10월 말 충격적인 신체검사 불합격 발표 이후 모든 계획이 꼬여버리고 말았다.
불합격 발표 이후, 나 역시 그 결과에 실망했지만 이윽고 난 그저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합격 발표를 기다렸던 지난 2개월이 너무나도 힘들었기에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결론이 나와 마음이 가벼워져서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너무 후련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합격 발표로 모두들 들떠 기뻐하던 당시 커뮤니티 카페에는 나를 비롯한 극소수의 불합격자들이 있었는데, 불합격자들이 조용히 카페에서 사라지는 동안, 나 역시, 장문의 메시지를 남기고 그 카페를 떠났다.
벌써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동안 다들 너무 고생이 많았습니다. 수개월에서 수년을 준비했는데 모두들 좋은 결과가 있어서 기쁩니다. 저 역시 짧은 기간이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는데 마지막 관문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해 버려서 이번엔 함께 못하지만, 언제 어디서 우리가 어떻게 살다가 또 만날지 모르니 항상 원하는 일을 이루면서 나아가길 바랍니다. 아무튼 저는 계속 제 꿈을 향해 도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 당시 승무원 학원의 강사였던 친구와(동갑이라 나중엔 친구가 됨) 따로 밥을 먹게 되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내가 커뮤니티에 남긴 마지막 인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거 읽고 나 깜짝 놀랐어. 왜냐하면 내가 예전에 너와 아주 비슷한 경우로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도 내 모임 카페에 정말 비슷한 글을 남겼었거든.’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나에게 한 마디를 더 해줬는데 그 날의 이 한 마디는 여전히 나에게 보이지 않는 힘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그냥 내 느낌인데, 넌 뭘 해도 해낼 것 같아.’
아마 큰 의미 없이 그저 느낀 대로 내게 남긴 말이었겠지만,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세상이 나를 밀어붙일 때마다 그 친구가 남긴 그 한 마디가 계속해서 나를 붙잡아주었다. 가진 것도 없고,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에게 누군가가 건네준 믿음의 한 마디는 가슴에 새겨져 평생에 걸쳐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준 것이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말 덕분에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것을 꼭 이룰 것이라는 믿음이 더 굳건해졌다.
좋은 말은 타인이 해줄 때 가장 빛난다.
그 타인은 가족이나 연인이 아닌, 말 그대로 혈연이나 법적으로 아무런 관련 없는 타인 일 때, 어쩌면 좀 더 강력한 동기부여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울타리나 연인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예상 가능한 말이 아닌, 타인으로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함께 지내는 동안 그 사람이 쌓아온 신뢰와 평소에 보여준 언행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솔직한 인정이자 진심의 위로가 담겨있기 때문에 어쩌면 가족이 해주는 말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말 한마디는 마법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작게는 지친 삶 속에서 미소 짓게 만드는 것부터, 삶에 부딪히고 지쳐 쓰러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까지, 그런 순간마다 머릿속에 경종을 울려 다시 살아나갈 힘을 북돋아주는 기적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일련의 경험들을 겪으며 어느 순간 나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나는 과연 내가 살아오는 지난 시간 동안 누군가에게 그 어떤 좋은 말 한마디를 건네었었나? 아니면 좋은 말은커녕, 혹시 상처가 되는 말로 누군가를 괴롭힌 건 아닐까? 혹은, 나 살기에 바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며 살진 않았었나?
우리는 작은 한 마디의 말로 사라져 가는 타인을 다시 살려낼 마법을 가진 마법사들인데, 그동안 그 마법을 너무 아끼고 아낀 구두쇠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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