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삶에 가격이 매겨질 수 있을까?
# 보험은 내 몸값?
월비용을 정리하다 보니 월마다내는 보험료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수개월 전에도 그 비용에 대해 적잖이 놀라기도 했었는데 그 사이에 까맣게 잊고 있었나 보다. 그중 한 달에 약 16만 원 정도의 비용이 종신보험으로 나갔는데 결코 적은 비용이 아니다. 매월 16만 원이라니.. 연간 192만 원의 비용이 종신보험 비용으로 나가는 거다. 이렇게 큰 비용이 나가는데도 나는 종신 보험을 든 이유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본적 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왜, 누구를 위해 종신보험을 들었을까?
종신보험은 다들 알다시피 '내'가 죽은 후에 나오는 보험금이다. 사실 그렇다 보니 한 집안의 가장이 많이 드는 보험이다. 집안의 경제력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기라도 하면 경제적인 가장이 사라진 한 집안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하기에 이 보험을 드는 것이다. 그럼 내가 든 종신보험은 사후에 얼마나 보상을 해줄까? 그게 과연 내가 없는 내 가정이 나 없이도 이 험한 세상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하거나 혹은 한 사람의 죽음에 따른 상처와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줄만큼 충분할까? 종신보험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군가에게 그건 1억이고 누군가에겐 수 억은 될 테다. 그럼 과연 그게 죽음을 맞이한 한 가장이 남겨줄 수 있는 경제적인 보상이 될 수 있을까? 그럼 그것도 일종의 그 사람의 몸값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종신보험료가 1억 원이면 나는 1억 원짜리 사람일까?
이건 마치 ‘내 연봉이 5천만 원이니 난 5천만 원짜리 사람이구나’하고 인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질문이다. 하지만 사회는 냉정하고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내가 부자에다 월마다 버는 돈이 많다면 내가 사후에 남길 수 있는 것도 충분히 많을 것이고 내가 든 종신보험 역시 사후에 겨우 1억을 받는 보험이 아닌 적어도 10억 또는 그 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1억 원짜리 종신보험 든 게 내 몸값이 1억 원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지금 매월 겨우 그 정도의 비용을 낸다는 건 나의 경제적인 위치, 능력이 그 정도이고 따라서 갑자기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내 몸값으로 딱 그 정도의 보상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 인간으로서의 나는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존재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고고한 해석일 뿐이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에서 나의 가치를 매긴다면 나는 내 연봉으로, 그리고 사후에 받게 될 보험금으로 내 몸값이 매겨질 뿐이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이고 인정하기 싫어도 결국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현재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인정하기는 싫겠지만, 이직을 할 때마다 연봉을 높이는 것도 월급 사이사이 받는 보너스나 상여금에 우리의 기분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고 이벤트들이 생겨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자칭 9년 차 작가로서 위와 같은 산술적인 사고는 지극히 싫어하지만 문득 보험금 관련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들며 이런 결과에 도달하다 보니 나름 자본주의적 사고 내에서는 위와 같은 가치판단도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보험회사들, 결혼정보회사 등 에서는 사람 하나하나의 가치가 이런 기준으로 매겨질 테니 말이다.
# 나의 가치는 얼마인가?
그렇다고 정말 내가 또 어느 누군가가 딱 그 정도 비용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동시에 그렇기에 더 나은 혹은 더 잘 버는 사람이 되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는 단순히 더 높은 연봉을 받고 운이 따라줘 벼락부자가 되는 등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학교에서 회사에서 과연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그걸 비용으로 따지면 얼마이고 한 마디로 말하면 어떤 단어이며 시 한 구절로 표현하면 어떤 비유와 은유로 나를 그려낼 수 있을까? 한 사람으로서 나의 가치는 얼마일까? 나는 과연 어떤 평가를 받는 사람일까? 그리고 사후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에 남을까?
어쩌면 아무런 부질없는 고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쉴 틈 없이 바쁜 삶을 사는 중간중간 잠깐의 휴식을 찾는 틈틈이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와 가슴에 켜켜이 쌓여 나를 흔들어 놓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은 대개 바보 같지만, 그게 바보 같은 줄 알면서도 그 생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면 굳이 그런 생각을 피하기보단 한 번쯤 진지하게 그런 생각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연봉이니 보험금이니 비록 현실적인 수치지만, 언제까지 동화 속의 해피엔딩 같은 달콤한 이야기만 추구할 순 없으니 말이다. 물론, 동화 같은 몽상이 삶을 더 윤택하게 하고 여유 있게 만들어주겠지만, 또,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요인 중 하나가 물질적인 윤택함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가 끄덕여질 테니 말이다.
2018년 연말 현재.
누군가는 어린이고 누구는 학생이며 또 누구는 직장인이고 그중 누구는 가장이며 또 아버지, 어머니일 테다. 우리는 서로를 감히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존재라고 규명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은 효율로서 풀이되고 우리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재화를 통해 위치와 가치가 매겨진다. 덕분에 아이들은 배우고 자라며 또 먼 훗날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삶의 참 맛을 깨닫고는 누구는 사회에 적응하여 변질되고 또 다른 누구는 그래도 인간적인 가치를 잊지 않고 실천하며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
그렇기에 의미 없는 질문이다. 내 몸값은 얼마고 사회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일까? 연봉은 얼마이고 보험금은 어떻고..
월 16만 원의 보험료, 당장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받을 수 있는 보험금 1억 원.
이는 내가 지금 이 순간 사회 속에서 지불할 수 있는 내 몸값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자 또 사후에 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몸값이지만 난 더 이상 장난으로라도 이를 통해 나를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 사회 속의 나는 슬프도록 초라하고 나약하지만 사실 내가 알고 있는 진짜 나는 여전히 젊음의 열정과 어린아이의 에너지로 가득 찬 영원히 빛나며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기에.
혹자는 이를 망상이라고 부르겠지만 난 현실 속 꼭두각시로 인생의 마지막까지 끝나지 않는 무대만을 사느니 하루하루가 나이기에 즐거운 모험을 하고 싶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과 아득히 멀리 보이는 푸른 산 그리고 이를 둘러싼 쪽빛 바다, 그리고 이 모든 모험을 관망하는 파란 하늘과 빠져들듯 검은 밤하늘. 이 모든 게 우리를 키워낸 요람이니, 난 영원히 이 요람을 개척하고 싶다.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삶은 생업을 위해, 모험가로서의 삶은 내 영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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