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당신의 첫사랑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 말아요

황순원 형님의 한마디를 새겨봅니다

by Rooney Kim

대개 여자들은 봄이 되면, 남자는 가을이 되면 싱숭생숭해지는 가슴을 부여잡기 힘들어 바깥으로 외곽으로 나간다죠. 꽃놀이, 단풍놀이를 간다고 하지만 사실은 무엇에 들떴는지도 모를 감성을 꽃피우거나 털어내기 위해 나가는 거겠죠. 그리고 그런 감성의 중심에는 항상 과거의 추억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럼, 당연히 지나간 옛사랑에 대한 기억도 몇 조각 있겠죠? 이미 연인이 있거나 결혼한 사람들에겐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또는 위험한(?) 추억일 수 있겠지만, 우리 솔직해져 봅시다.


가끔, 너무나도 감상에 젖게 되는 날, 문득문득 떠오르는
추억과 얼굴이 있지 않나요?


그중 하나는 아마도 첫사랑일 겁니다. 첫사랑이야말로 순수해서 어설펐던, 그래서 여전히 아쉽고 기억에 남는 추억이니까요. 따라서, 오늘은 이 형님을 모셨습니다. 순수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설레게 담아낸 한국 현대 문학의 최고봉, ‘소나기’의 황순원 형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황순원입니다.

제가 2000년도에 세상을 하직하고 저승의 세계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제가 이미 50년도 더 전에 죽은 줄 아는 사람이 있더군요. 네, 90년대에 중,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라면 여러분들이 제 소설을 배울 때에도 전 여전히 살아있었단 말이죠. 신기한가요? 하하, 아무튼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분재 사장이 부탁한 오늘의 주제에 집중하도록 하죠.


첫사랑, 처음 느껴본 가슴속 찌릿함



사랑. 사랑을 안 해보신 분 계신가요? 아니면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도대체 사랑과 좋아함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신가요?


사랑과 좋아함의 차이는 워낙 개인차가 있다 보니 쉽게 딱 잘라서 나누긴 어렵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과 그 어떤 고난(경제적 어려움, 가족의 반대 등)을 무릅쓰고서라도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좋은 곳을 갔을 때, 마치 가족처럼 얼굴이 떠올라 나중에 꼭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인지, 마지막으로 나 혼자 희생해도 좋으니 평생 옆에 두고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인지 말입니다. 뭐 그렇다면 ‘사랑’이라도 봐도 좋을 것 같네요.


하지만 사랑한다고 모두 결혼하는 건 아니듯이 우리 모두는 다들 ‘지난 사랑’의 추억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게 첫사랑일 수도 있고 아닐 수 도 있지만 어찌 됐든간 ‘당신의 일상 중 문득 떠올라 안부를 궁금하게 만드는 옛 연인에 대한 감정’으로 잠깐 생각에 잠긴 적은 있었을 거란 말이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경우 잠시 옛 추억에 빠져 감상적이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옛 연인에게 연락을 하는 경우는 드물죠. 네, 아주 현명한 겁니다.



소나기에서 어린 소녀는 병을 앓던 도시 소녀였습니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인 어린 소년은 시골에서 나고자란 순박한 아이였죠. 둘은 서로에게 관심이 많았고 곧 친구가 되었죠. 하지만 소년은 소녀의 병에 대해선 전혀 모른 채 급속도로 친해졌고, 들길에서, 비탈에서 놀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수숫단에서 비를 긋기도 하고, 후에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는 소녀를 업고 불어 넘친 개울물을 건너기도 했죠.


소녀와 소년은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그 둘의 감정 역시, 풋풋한 사랑이라면 사랑이겠지요. 하지만 불치병을 앓는 소녀와 그걸 모르고 순박하게 그녀를 좋아하는 소년이라는 설정에서 이미 슬픈 결말은 예정되어있었습니다. 소나기를 맞고 놀던 날, 소녀는 자신을 업고 개울을 건넌 소년이 못내 믿음직스러웠을 겁니다. 그래서 분홍 스웨터의 앞자락은 검붉은 물이 들었지만, 그건 소녀와 소년의 소중한 추억의 상징이 됐지요.


“윤초 시댁도 말이 아니어. 그 많던 전답을 다 팔아버리고. 대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더니, 또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애는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가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그리고 며칠을 앓고, 어쩌면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했을 소녀는 그 옷을 그대로 입고 마지막으로 소년을 만났죠. 소년은 핼쑥해져 아파 보이는 소녀가 신경 쓰였지만 그 날과 같은 옷을 입은 모습에 어쩌면 서로 통하는 마음에 반가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둘이 헤어지고 소녀는 죽기 전 부모님께, 검붉은 물이 든 옷을 입은 채로 묻어달라고 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소년의 가슴에는 이사 간 다던 소녀가 사실은 죽음을 맞았단 사실에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겠지요.


소녀는 추억이 깃든 옷을 그대로 죽음까지 가져가며 추억으로 간직합니다. 그리고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을 추억할 물건 없이 그렇게 소녀를 보내야 했지요. 둘에게는 풋풋하고 슬픈 사랑의 마지막이지만 어찌 보면 다시는 만날 길 없이 각자의 추억을 보듬고 지고 가며 마무리된 완벽한 사랑의 끝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소녀는 죽음으로, 또 소년은 더 이상 추억할 물건이나 만날 대상이 없이 순수한 사랑을 마무리지었으니 말입니다.


추억은 조작되기에, 그저 기억 속에서 간직하길



아마 아직 혼자인 사람들, 아니,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일지라도 술에 취해, 또는 추억에 취해, 밤이라는 장막이 가려주는 나의 부끄러움이 희미해진 틈을 타 옛 연인에게 연락하거나 문자 메시지를 남겨본 적도 있을 겁니다. 하나, 대부분은 연락이 안 되죠. 이미 지난 추억일 뿐이니까요. 설사, 수년 혹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 만나게 되더라도 실망 또는 후회만 남을지도 모릅니다. 과거에 아름다웠던 그 모습과 행복했던 추억 안에 남아있던 잔상은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현실은 아닐 테니까요.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황급히 우산을 챙겨 나가도 이윽고 비는 그치게 마련이고, 때문에, 종종 챙겨간 우산이 무색해질 때가 많죠. 갑작스레 터져 나온 옛 추억으로 소나기 같은 감정에 젖어 과거의 누군가에게 연락해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과거의 그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폭포수 같은 추억의 감정은 수도꼭지를 잠근 듯 사라져 버려 서로 무안하고 머쓱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나간 사랑에, 추억에 연연해 이미 과장되고 채색된
과거 기억 속의 연인에게 ‘얼굴이나 보자며’ 연락하지 마세요.


그들은 잘 지내고 있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잘 살고 있고 어쩌면 가끔 ‘당신 생각’이 떠올라 당신처럼 옛 추억에 젖어들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저 ‘소나기’처럼 지나가는 잠깐의 망상일 뿐, 현실이 아니랍니다.



소나기의 소녀, 소년처럼, 옛사랑과의 소중한 추억은 그저 자신의 가슴에 묻고 그저 한 번 떠오르면 피식 웃고 마는 햇살 아래 반짝이는 조약돌 같은 기억으로 간직하길 바랍니다. 가끔 생각날 때 한 번 움켜쥐고 혼자 꺼내본 뒤 다시 집어넣으면 그만인 그런 추억으로 말입니다. 방금 막 소나기가 그쳤습니다.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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