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고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김가장은 저물어가는 한 여름 늦은 오후의 채광이 번지는 주방의 작은 창과 반쯤 열린 다용도실 문을 통해 보이는 파란 하늘, 구름 그리고 잔잔한 바람에 흩날리는 창밖의 나무를 보며 기분 좋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 분위기는 뭐랄까 몹시 안락하고 포근한 ‘평화’ 그 자체였다.
‘김가장: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제가 주방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게 말이죠.'
가뜩이나 디자인, 가구,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김가장이 주방과 부엌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부터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가스불을 이용하여 라면을 끓이기 시작한 그는 맞벌이를 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스스로 밥을 차려 먹는 일이 잦았다. 아마, 라면 두 개를 끓여 형과 정확히 반으로 나눠 먹던 때부터 요리에도 눈을 떴는지 모르겠다.
김가장은 주방에 관심이 많다. 요리를 좋아하는 것도 영향을 미쳤지만 요리를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 매번 주방가구와 식기류들과의 스킨십이 잦다 보니 생긴 애착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그랬고, 동료의 집들이, 특히, 새롭게 인테리어 공사를 한 집에 방문할 때면 그 집의 구조는 어떻게 생겼을지 그리고 주방은 어떨지를 상상하며 가곤 했다. 가령 씽크볼 크기와 수전의 디자인 및 편의성, 상하부장의 색상,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모양이 일자인지, 기역자 또는 디귿자인지 등 평형에 따라 분류되는 주방 가구 사이즈는 물론, 서랍의 크기와 소스류를 담은 수 있는 길쭉한 서랍의 유무도 중요하다. 거기에 아일랜드 테이블, 팬트리 그리고 다용도실의 사이즈까지 그의 주방에 대한 관심사는 폭넓다. 주방 가전과 식기류까지 얘기하기엔 너무 방대해지니 김가장과 합의하여 이번에는 주방 위주로만 이야기하겠다.
김가장은 주방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장소 중 특히 중요하게 보는 두 곳이 있는데, 바로 다용도실과 팬트리다.
주방 최애: 다용도실
꿈의 다용도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일 뿐입니다
김가장에게 다용도실은 단순히, 환기 용도 및 창고처럼 활용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는 집을 평가할 때 다용도실의 유무에 따라, 그리고 다용도실이 주방에 붙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그 집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굳게 믿는다. 주방에게 다용도실은 마치 또 하나의 폐와 같다. 즉, 주방의 좌 또는 우로 트여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로하여 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게 해주는 가스실의 방독면과 같은 존재다.
현대적인 포스트 모더니즘의 디자인을 반영한 세탁기와 건조기가 겹쳐 쌓여있는 세탁 타워 그리고 그 옆으로 놓여있는 세탁세제와 용품이 담겨있는 3단 장이 말끔하게 정리되어있는 모습은 마치 방금 막 빨래한 옷은 뽀송뽀송하게 말려 바로 입은 듯한 정갈한 기분이 들게 한다. 더 말해 뭘 하랴. 해 질 녘 다용도실의 창문이나 문틈 사이로 은은하게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낭만적인 채광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김가장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테다.
주방 최최애: 팬트리
김가장에게 대한민국 주방의 기준을 둘로 나누라고 한다면 그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독립된 팬트리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 주방은 좋은 주방이요. 만약 팬트리가 없다면 그 주방은 그저 아쉬운 주방일 뿐. 세상에 나쁜 주방은 없다.'
김가장에게 팬트리는 사실상 주방의 로망에 대한 핵이다. 주방을 크게 내핵과 외핵으로 나누자면 김가장은 망설임 없이 팬트리에게 내핵의 타이틀을 줄 것이다. 이런 팬트리에도 종류가 많다. 김가장처럼 주방의 상부장 중 일부를 팬트리로 쓰는 것부터, 냉장고 장 옆으로 만들어진 기다란 문이 달린 팬트리 그리고 완전히 독립된 방으로 이루어진 팬트리까지 너무도 다양하다. 하지만 하나같이 소중하기에 독립 여부와 공간의 사이즈를 떠나 무엇하나 나무랄 순 없다. 그런데 이 중 왕중왕은 독립된 방을 갖추었으면서 출입문의 반대편에 다용도실로 연결된 문이 있는 즉, 다용도실로도 바로 나갈 수 있도록 내부에 문을 하나 더 갖춘 팬트리다. 이는 환기는 물론, 동선도 뛰어나고 공간적으로 더 큰 개방감을 줘, 다용도실처럼 뛰어난 폐활량을 가진 주방의 제2의 폐로서 역할도 하는데, 팬트리의 열린 문으로 은은히 스며드는 오후의 채광이 삶의 감성적인 질을 한층 높여줘 정신 건강의 측면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한다고 김가장은 믿는다.
일반적인 팬트리와 양방향으로 뚫린 문을 가진 꿈의 팬트리. 김가장네와 관련 없음
팬트리는 기본적으로 팬트리가 가진 음식물 저장고의 기능면에서 봐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각효과를 준다. 면류, 소스류, 분말류, 액체류, 깡통류, 레토르트류, 과자류 등으로 자연스럽게 정리되어있는 팬트리가 주는 꿀이 넘쳐흐르는 자원의 풍족함을 통한 만족감을 느껴본 이가 있다면 김가장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잘 정돈되어 가득 찬 팬트리가 곤히 잠들어 숨 쉬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하, 만약, 그런 팬트리가 없이도 여태 잘 살아왔으니 문제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감히, 김가장은 이렇게 답해줄 것이다.
‘팬트리 없이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직 좋은 팬트리가 있는 삶을 못 살아봐서 그래요. 한번 겪어보면 깨닫게 되죠. 팬트리는 사랑이라는 걸..’
게다가 김가장은 요리를 좋아한다. 그동안 만들었던 요리만 해도 100여 가지가 넘는다. 따라서, 주방을 볼 때 요리 시 동선, 재료들을 놓을 위치 등을 보며 그 주방의 점수를 매긴다. 따라서 그는 조리대, 좋은 주방가전 및 식기류, 주방 다용도실 그리고 훌륭한 팬트리를 갖춘 완벽한 주방을 보면 당장이라도 뭔가 요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에 사로 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런 집은 대부분 남의 집이었기에.
김가장네의 팬트리는 총 3곳으로 나뉘어있는데 여기는 그중 과자 팬트리. 뒤에 냄비는 눈여겨보지 말길 바란다
드디어, 작년 연말, 서울로 상경한 지 11년 만에 (대출을 많이 끼고) 첫 내 집 마련에 성공한 김가장은 생애 최초로 집 전체 리모델링을 했다. 그리고 역시, 그는 주방에 많은 신경을 썼다. 큰돈을 들였다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 색상, 구조 등 주방 인테리어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말이다. 호불호 없는 흰색+ 회색 배열의 상하부장, 길쭉한 화이트 주방 타일, 비규격을 포함하면서도 고집한 기역자형 주방까지. 김가장은 이후 신혼초부터 줄곧 사용해온 기존 아일랜드 식탁을 기역자 주방에 놓으면서 30평 형대에서나 가능하다는 주부의 로망, 디귿자 주방을 완성했다.
올해 초, 김가장은 새 집으로 이사를 온 뒤 하루하루 감격하는 나날을 보냈다. 수개월 전 어느 주말 쾌청한 날씨 덕에 채광이 좋았던 오후, 김가장은 그녀 몰래 주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다가 디귿자 주방의 가운데로 들어가 바닥에 조용히 드러누웠다. 아일랜드 식탁과 하부장의 높이가 주는 공간감에 묻혀 포근한 기분마저 들었다. 거실에 비해 비교적 어두운 주방이었지만 그날은 반사된 채광이 이불처럼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분명, 그는 어린 시절 여름방학 동안,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시던 엄마와 화목한 가족이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채광 좋던 부엌이 떠올랐을 테다. 시원한 바닥은 그의 몸에 밴 열기를 앗아주고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선선하게 그의 몸을 식혀줬다. 그렇게 김가장은 은은한 햇살이 만든 아늑한 분위기에 솔솔 잠이 들었다.
김가장, 아니, 김주부는 지금 너무 햄볶하다. 그의 생애 첫 집은 물론, 원하는 대로 꾸미고 바꿀 수 있는 자가 소유의 부엌을 처음으로 가졌기에.
*참고: 수납에 자신이 없다면 무조건 상부장을 하길 권한다. 어설프게 오픈형 상부장을 했다가는 매주 먼지와의 전쟁을 해야 하고 오래도록 청소를 안 하면 찌든 때의 고통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상부장이 주는 만족스러운 알참은 아는 사람은 안다. 유행은 유행일 뿐. 결국, 실용성이 답이다.
[이미지 출처]
https://blog.decorsteals.com/2019/07/11/a-dream-laundry-room-makeover/
https://citypradiumcj.modoo.at/?link=6bli2qab
https://m.blog.naver.com/thegracefulhouse/2210941170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