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 로맨스 2부

여학생은 어려워

by Rooney Kim


다음 날 학원에 조금 일찍 갔어. 집에서 일찍 나오기도 했고 당연히 교실엔 아무도 없었지. 난 평소대로 내가 앉는 중간 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고 연습장에 낙서나 하다가 뭔가 출출해져서 학원 뒤에 있는 슈퍼로 가서 자갈치를 한 봉지 사 왔어. 다시 교실로 가서 자갈치를 먹으면서 놀고 있으니 애들이 하나둘씩 들어오더라. 항상 지윤이랑 같이 앉는 여자애가 교실 우측 맨 앞자리 안쪽에 앉더니 지윤이 자리를 맡아 주더군. 둘이 친해 보였어. 전에 말했듯이 학원에 친한 친구들이 없어서 혼자 앉는 게 익숙했어. 그래서 이런저런 망상에 빠져 자갈치나 먹고 있었지.

'끼이익'

문이 열리고 지윤이가 들어왔어. 옥스퍼드 셔츠 위에 얇은 밝은 회색 니트를 덧대 입고 언제나처럼 블랙진을 입은 모습이 한결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눈이 마주친 거야. 전에는 거의 그런 적이 없었거든. 어제 새우깡 일도 그렇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어색하게 손을 들고 인사를 했지.

"아, 안녕?"

지윤이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친구가 맡아둔 자리로 가더라. ‘호호 깔깔’ 둘은 어찌나 시끄러운지 나를 향한 인사와의 온도차가 마치 봄과 가을 같았지. 하긴 나랑은 친하지도 않으니 별 상관은 없었어. 곧 수업이 시작되었고 난 또 혼자만의 공상에 빠졌어. 왜? 수학은.. 너무 어려우니까. 물론, 중2 수학이니 대충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난 계산적인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어. 몹시 인간적이고 문학에 가까운 사람인 거지. 여튼 그러다 보니 어느새 수업도 끝났고 아까 접어둔 자갈치를 하나 꺼내 먹으려는데 지윤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또 나랑 눈이 마주친 거야. 갑자기 우물쭈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어떡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말을 걸었지.


"이거 먹을래?"
난 분명히 나의 호의와 진심을 담아 물었어. 사실 그동안은 여자애들에게 뭐 먹으라고 물어볼 일이 별로 없었거든.
"아니."

그런데 안 먹겠데. 지윤이는 새우깡만 좋아하나 싶었지. 그래서 난 영어반으로 가기 전에 다 먹고 가려고 앉아서 빠른 속도로 자갈치를 먹기 시작했어. 마치 썰물에 나온 게가 뻘밭에 이것저것 무기물을 섭취하듯 재빠르게 먹었지. 거의 다 먹을 때쯤 가방을 싸서 영어반으로 가려고 나가는데 지윤이가 들어오더라. 지윤이의 다음 수업은 같은 반에서 그대로 한다더군.

"나도 줘."

"응?"

"자갈치, 아까 준다매?"

분명 3분 전에는 안 먹겠다고 한 얘가 갑자기 나타나서 다시 과자를 달라니 이건 뭐.. 싸우자는 건가 싶었지. 문제는 내가 자갈치를 재빨리 먹는 바람에 두세 개 밖에 남았다는 거야.

“어.. 아.. 근데 이제 몇 개 안 남았.."

"다 뭇나?"

"아니, 아까 안 먹는 다길래 빨리 먹고 영어반 갈라고.. 이거밖에 없다.."

지윤은 자갈치 봉지 안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어.

"이거라도 도."

그래서 과자 봉지를 탈탈 털어서 지윤이에게 자갈치 세 개를 건네줬지.

"고마워."

지윤은 다시 쪼르르 친구에게 달려갔고 둘은 뭐가 좋은 지 또 ‘꺄르르깔깔’ 엄청 시끄러웠어. 그리고 난 영어반으로 갔지. 그 날 이후 학원을 마치고 집에 갈 때 1층에서 지윤이를 마주치면 내리막길이 나올 때까지 같이 집으로 갔어. 어차피 5분도 안 되는 거리라. 별 얘기는 안 했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다 마치고 내려갔는데 지윤이가 1층에 서 있는 거야. 누구를 기다리나 했는데 내가 나가니 어색하게 인사를 하길래 난 그냥 같이 집에 가면 되겠다 생각했지. 그래서 같이 길을 걸어갔어. 그런데 갈림길인 내리막 길에 다다를 때쯤 혹시 지윤이가 일부러 날 기다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에이, 그런데 그럴 리가 없잖아.’

옆을 보니 지윤이 정면만 보고 걷는 중이었는데 표정을 보니 날 기다린 건 아닌 것 같고 여튼 좀 헷갈렸어. 이후로 몇 번을 그렇게 누굴 기다린 마냥 나랑 같이 집에 가다 보니 이젠 이런 생각이 들었어. 만약 일부러 날 기다려준 거라면 친구로서 나도 뭔가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물었지.

"느그 집, 어디로 가는데?"
"..왜?"
"집 앞까지 델따주께."

지윤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따라오라는 듯이 집 쪽으로 발을 돌리더군. 내리막길 옆으로는 한 때 친했던 동생이 사는 한전 아파트가 있었고 그 옆으로 낮은 주택과 낡은 집들이 낮은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듯 늘어져있었지. 갑자기 괜히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고 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 집 앞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보여줘야 해서 곤란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낡은 집들이 늘어선 비포장 길의 끝에 다다르자마자 안도했어. 굉장히 높은 고층 아파트 단지의 입구가 보였거든. 꽤 좋아 보이는 아파트였어.

"다 왔어. 잘 가."

"어. 잘 가."

다시 발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 '드디어, 학원에서도 같이 인사하고 가끔 얘기도 다닐 수 있는 친구가 생겼구나' 아니, 그런데 학교에는 친구도 많은데 누가 보면 왕따인줄 알겠네.


어느새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돼서 평소처럼 학원에 갔어. 교실에 앉아있는데 수업 시작 직전에 지윤이가 들어오더라. 그래서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 인사하려는데 지윤이는 평소랑 다를게 없이 눈을 살짝 마주치고 고개만 까딱이고는 자기 절친 옆에 쏙 하고 앉아버리더라고. 난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손 정도는 흔들어줄 줄 알았는데 나만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한 건지.


‘여자는 친구라도 역시 어렵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재밌는 건. 지윤이네 반 수업이 나보다 좀 빨리 끝나면 (나를 일부러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만) 마치 우연히, 아주 자연스럽게 1층에서 마주쳐서 같이 집에 가는 날이 좀 많아졌다는 거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날 기다린 것 같아 보이진 않았어. 왜냐하면 학원 뒤에 슈퍼가 있었는데 거기서 뭘 사서 나오다 학원 1층 근처에서 마주친 적이 많았거든. 그리고 어떤 날은 내가 먼저 마쳐서 1층에 아무도 없으면 그냥 집에 갔는데 한 번씩 뒤를 돌아봐서 지윤이가 보이면 같이 가는 정도였어. 여튼 그냥 둘 다 그 정도 친구 사이를 유지하며, 시간이 맞으면 같이 집으로 걸어가는 게 전부였지. 그래도 확실히 좀 친해졌다고 느낀 건 이것 때문이야. 수학 시간 전에 지윤이가 과자를 사 오면 지윤이는 보통 절친 외에 그 누구에게도 과자를 나눠준 적이 없었는데 좀 친해진 이후로는 나한테도 과자를 먹을 건지 꼭 물어봤어. 이 정도면 수학반에서는 친한 편 아냐?


그렇게 별 일 없던 학원에 어느 날 너무 명랑해서 시끄러울 정도인 여자 애들 세명이 새로 들어왔어. 걔들도 수학은 나랑 같은 반인데 영어는 안 듣는 건지 다른 반인지, 우리 반은 아니었어. 셋이 어찌나 친하고 명랑한지 수업시간에도 서로 웃으면서 킥킥대는 건 물론이고 학원에 올 때나 쉬는 시간에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셋다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를 않더라.


그런데 웃음소리는 왜 또 그렇게 커? 원래 여학생들이 그렇게 크게 웃나?

남중을 다니다 보니 여학생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서 적응이 안되더라. 그래도 인상 쓰고 화내고 애들 괴롭히고 다니는 것보다는 낫잖아. 친한 애들끼리 뭉쳐있는 걸 보니 살짝 부럽기도 했어. 맨날 깔깔대면서 웃고 다녀서 나 혼자 걔들을 이렇게 이름 붙였어. ‘깔깔 삼인방’


그러던 어느 날, 방과 후에 학원에 가서 교실에 들어가려는데 교실 안이 소란스러운 거야. 몇 미터 전부터 웃음소리를 보니 깔깔 삼인방이 먼저 와 있는 것 같았어. 별생각 없이 문을 열렸는데 그중 두 명이 나오다 나랑 마주친 거지. 난 그냥 들어가려는데 별안간 나한테 인사를 하더라.

"안녕?"

굉장히 당황스러웠어.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데 안 받아주며 걔들이 또 얼마나 민망하겠어. 그래서 나도 인사하고는 얼른 내가 항상 앉는 자리로 갔지. 그런데 하필 걔들이 내 뒷자리에 앉았더라고. 어차피 수학 시간은 나도 집중을 잘 안 해서 떠들어도 상관없는데 뭔가 되게 어색했어. 곧 지윤이도 학원에 왔고 눈인사로 인사했고, 난 내 자리에 앉아서 또 낙서나 하고 있었지. 잠시 후 아까 나랑 마주쳤던 여자애 둘이 과자를 잔뜩 사 와서는 뒤에서 아주 소란스럽게 먹기 시작했어. '어디서 돈이 나서 매번 저렇게 간식을 사 먹나' 싶었지.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볼펜으로 내 어깨를 툭툭 치는 거야.


"야..."
영문을 몰랐던 난 '왜' 하고는 휙 하고 돌아봤어.
"이거 먹을래?”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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