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좋아
여자애 셋 중 하얗고 통통하게 생긴 애가 딸기맛 산도를 내밀며 묻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과자이기도 하고 고맙게도 먼저 용기를 내서 베푼 호의를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고맙다고 답하곤 과자를 받았지. 그러고 나니 또 뒤에서 깔깔껄껄 한바탕 웃음 폭탄이 터지더군. 도무지 뭐가 저리 좋은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그런 생각에 잠겨 고개를 들었는데 지윤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야
그래서 딸기맛 산도를 들어 올리면서 '혹시 이거 하나 먹을래'하고 눈으로 물었어.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뭔가 묘하게 냉랭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홱하고 돌리더니 다시 돌아 앉더라. 아니, 왜? 난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싶었어. 마침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딱히 물어볼 타이밍도 없이 그렇게 지나갔어. 수업이 끝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영어 수업은 각자 다른 반이라서 학원이 끝나면 1층에서 물어볼 생각이었어. 영어반이 조금 늦게 끝나는 바람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겨서 바로 교실을 나왔는데 마침 깔깔 삼인방도 수업이 끝났는지 다른 반에서 나오는 중인 거야.
“야!”
아까 과자를 줬던 애가 날 부르고는 또 셋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엄청 웃더라.
"아, 안녕?"
그제야 다른 여자애 두 명도 인사를 하더라 그중 한 명은 꽤나 눈에 띄는 외모였는데 키도 컸어.
"니, 집에 가나?"
"어. 가야지."
"그래 그럼 같이 내리가자~"
1층에 가면 지윤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얘들이랑 같이 내려가는 게 조금 신경 쓰였어. 남자 애들은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 아까 수학 시간에 쟤들한테 과자를 받은 이후부터 태도가 변한 지윤이를 보니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었지. 그런데 집에 가려면 계단으로 같이 내려가야 하는데 내가 굳이 따로 간다고 하기도 그런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같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어. 그런데 얘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신나게 깔깔대더라고 계단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였어. 별로 할 얘기가 없던 나는 조금 빨리 계단을 내려갔지. 아직 친하지도 않은 여자애들 세 명이랑 같이 내려가는 것도 어색했고 말이야. 게다가 혹시나 지윤이가 기다릴 수도 있으니 신경이 쓰이긴 했어. 마지막 내려가는 계단에서 고개를 숙여 입구 쪽으로 돌아보니 지윤이 발이 보이는 거야. 그래서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에 후다닥 내려가는데 또 쟤들이 부른 거지.
"야! 니 내일 학원 오나?"
아니 이게 무슨 질문이야. 내일이 화요일인데 당연히 학원에 오지.
"어, 온다. 왜?"
"아니. 꺄르르르르륵. 깔깔깔. 쟤 학원 온단다. 껄껄껄."
뭐든지 너무 과하면 기이해 보이는 법. 난 딱히 할 말도 없고 지윤이도 기다리니 같이 가려고 빨리 계단을 내려갔어. 그런데 내려가 보니 학원 건물 입구에 아무도 없는 거야. 순간 내가 잘못 봤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아주 멀리 한 백 미터 앞에 지윤이 혼자 집에 가고 있더라.
"야, 내일 보자!"
1층 입구를 막 나가려는데 깔깔 삼인방이 뒤에서 큰 소리를 인사하더군. 이런 게 쟤네들의 친해지는 방식인가 싶기도 했어. 난 혹시라도 지윤이가 나랑 같이 가려고 기다리다 간 게 아닌가 싶어서 지윤이 쪽으로 뛰어갔어. 급하게 달려갔지만 제법 친해졌다는 생각에 웃으면서 지윤을 불렀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표정이 어둡더라. 슬퍼서 어두운 게 아닌.. 뭐랄까, 뭔가 화난 느낌?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에 아무런 미동도 없이 날 한번 스윽쳐다보고는 다시 제 갈길을 가는 거야. 엄청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난 친구 사이에 이런 걸 그다지 꼬치꼬치 캐묻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일단 한 십여 미터를 같이 갔어. 갈림길인 내리막길에 가기 전에는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이. 아주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어. 지난주처럼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 줄 상황이 아니란 건 충분히 감지했지만 왜 그렇게 쌀쌀맞게 구는지 잘 모르겠더라. 내가 뭘 잘못한 건지..
그래서 며칠 동안 지윤이의 기분을 분석하며 패턴을 찾아냈어. 깔깔 삼인방이 없으면 나랑 친하게 지내다가 걔들이 교실에 들어오면 그냥 날 좀 멀리하는 거야. 지윤이가 낯을 좀 가리는 성격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그래도 같은 반 친구들인데 그냥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 가끔 이런 걸 보면 여자애들은 친한 친구가 되기 굉장히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당최 뭐가 마음이 안 들면 그 이유라도 정확하게 알려주던가. 아니면, 한 번 같이 다투던가! 여하튼, 그러던 어느 날, 삼인방이 인형이랑 작은 꽃 같은 걸 들고 학원에 왔더라. 포장이 되어있는 걸로 봐선 누구에게 선물을 주는 게 분명했어. 항상 그렇듯이 이미 교실 안에서 셋이서 깔깔대며 엄청 시끄러웠어. 나는 인사를 한 뒤 항상 내가 앉는 자리를 잡았어. 곧 지윤이가 들어왔고 또 새초롬한 표정을 하고는 친구 옆에 앉았지.
아니, 도대체 왜?!
곧 수업이 끝났고 난 영어반으로 가려고 수학반을 나섰어. 그런데 삼인방 중 통통한 애였던 하나가 쪼르르 내게 오더니 수업 끝나고 잠시 보자는 거야. 어디서 보자니까 학원 사무실 앞에 있으래서 알겠다고 했지. 왠지 지윤이가 더 별로 안 좋아할 거란 느낌이 들었어. 비로소 완벽하게 느꼈지 '여자들이랑 친구 하기 겁나 힘들구나'. 영어수업이 2분 정도 일찍 끝나서 사무실 앞에서 삼인방을 기다리는데 이미 수업이 끝났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안 나오는 거야. 그래서 걔들이 수업 듣는 교실로 갔는데 이미 수업이 끝났어. 알고 보니 우리 반보다 5분 일찍 끝났더라고. 이 삼인방이 날 놀리는 건가? 싶었다가 이유가 궁금하더라.
아니, 도대체 왜?!
이미 지윤이도 집에 갔을 테고 맥이 빠져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멀리서 깔깔 삼인방 소리가 들리더라. 말했잖아. 워낙 시끄럽고 말이 많은 얘들이라 100미터가 떨어져 있어서 알 수 있을 정도였지. 천천히 내려가면서 무슨 얘길 저렇게 하나 들어봤어. 왜냐하면 나보고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래 놓고 1층에서 저러고 있는 게 수상하잖아. 그런데 얘들이 그냥 떠드는 게 아니라 '니가 해라, 아이다, 선물도 니가 샀고 니가 해야지 민주야, 아 몰라 나도 모르겠다.' 대충 이런 실랑이를 벌이고 있더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인형과 꽃이 내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안 했어. 분명히 다른 학원에 좋아하는 오빠가 있다고 했거든.
“안녕?”
날 사무실 앞에 기다리게 하고 1층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삼인방이 좀 괘씸해서 그냥 아무 일 없는 듯이 내려갔어.
"아, 깜짝이야!"
그런데 삼인방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막 비명을 지르는 거야. 무슨 저승사자라도 본 듯이 말이지.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갔고 결국 민주가 인형이랑 꽃을 들고 있더군.
"왜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리고 왜 여기 있노? 위에서 10분도 넘게 기다렸다이가."
그러자 셋은 평소답지 않게 엄청 쭈뼛거리는 거야. 뭐가 부끄러워서 그러나. 설마 이걸 누구한테 전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여튼 짧은 시간 동안 미묘한 감정들이 오갔어.
"자, 이거, 니꺼다.."
셋 중에 조금 통통한 애가 수줍게 손을 내밀며 작은 인형과 꽃다발을 주는 거야. 중학생이 된 이후로 이성과의 이런 부류의 경험은 처음이라 굉장히 얼떨떨하기도 하고 너무 어색했지.
"어.. 그래 고, 고맙다."
내가 선물을 받자마자 깔깔 삼인방은 또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깔깔껄껄 자지러질 듯이 웃으며 뛰어나가더라.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어. 이걸 받아도 되는 건가. 돌려줘야 하나. 아님 나도 보답을 해야 하나. 과자라도 사줘야 하나. 기타 등등 별 생각이 다 들었지. 1층 입구를 돌아나가는데 지윤이가 불과 수 미터 앞에서 집으로 가고 있는 거야. 삼인방은 어디로 갔는지 이미 집에 가고 없었어.
"지윤아~"
난 지윤이랑 같이 집으로 갈 생각으로 이름을 크게 소리 질러 불렀어. 길가에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다 들릴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안 돌아보더라. 그때 내 손에 들려있는 인형과 꽃다발이 번득 생각났지.
'혹시 이걸 봤나? 그런데 이것 때문에..?'
난 다시 지윤이를 부를까 아님 달려가서 같이 집으로 갈까 잠깐 고민하다. 그냥 혼자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어. 나도 뭔가 신경 쓰이기도 했고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 다시 다음 날이 되었고 삼인방도 지윤이도 똑같았어. 삼인방과는 인사하는 사이가 된 이후에도 선물을 받은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어. 난 아무런 감정이 없었거든. 답으로 뭘 해줘야 하나 했지만 그만뒀어. 돈도 없고, 괜한 오해를 주기도 싫었어.
그렇게 별 일 없이 지내다 삼인방은 갑자기 학원에서 사라졌고 지윤이랑은 다시 예전처럼 친해진 기분이 들었어. 삼인방이 있던 동안에는 시간이 잘 맞아 집으로 갈 때에만 표정이 좋았는데 걔들이 사라지니 학원에 있는 내내 표정이 좋아 보였거든. 나도 그 정도는 볼 줄 아니까. 그래서 나도 기분이 좀 좋아져서 예전처럼 집으로 갈 때 지윤이네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어.. 이성이었지만 우린 좋은 친구였고 조금 다른 방식이었지만 그만큼 친한 정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어쩌면 나도 마냥 친구라고만 부르기엔 조금 다른 감정도 있긴 했겠지. 그렇게 강력하진 않았지만 말이야.
그런데 지윤이의 기분이 나아진 만큼 난 조금씩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 난 지윤이의 기분을 다 받아주려고 노력하는데 지윤이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표현하기만 했잖아. 도대체 왜 그럴까, 설마 삼인방을 질투했던 건가, 그렇다면 그 질투는 우정일까 혹은 좀 다른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생각이 들었고 점점 지윤이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게 좀 오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어. 그냥 친구니깐 말이지. 생각이 좀 복잡해져 있던 날이었는데 학원이 끝나고 나가보니 지윤이가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더라.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동시에 혹시 지윤이는 날 마냥 친구로만 보는 게 아닌 건 아닐까 하는 부담스러운 마음도 들기 시작한 거야. 어느새 내리막길이 저만 앞에 보였어. 당연히 지윤이는 내가 함께 내리막길로 내려가서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 줄거라 생각했겠지. 나도 엄청 고민을 많이 했어. 평소처럼 데려다 줄지 아님 그냥 집으로 갈지.
그런데 이런 미묘하고 일방적인 친구 관계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난 그냥 ‘잘가래이’하는 인사 한마디만 남기고 곧장 걸어서 집으로 갔어.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지윤이의 표정이 보이는듯했어. 몇 걸음을 걸어가다 슬쩍 돌아보니 내리막길을 내려갔는지 이미 안 보였어. 아마 지윤이도 예상치 못했겠지. 하지만 그저 학원에도 친한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뭔가 미묘하게 다른 방향으로 친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완전히 달랐어. 어쩌면 내가 오해했을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와 이성적으로 가까워지는 건.. 뭐랄까 부담스러운 느낌이 든거지. 나 하나 감당하는 것도 버거운 중학생인데 가까운 이성친구라니.
지윤이 이겐 미안했지만 우리의 우정은 거기까지였던 것 같아. 요즘에도 가끔 학원에서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하지만 예전처럼 과자도 같이 먹고 하는 정도는 아니야. 당연히 1층에서 서로 기다려주던 끈끈함도 없어졌고 집으로 가는 길도 다시 혼자가 되었지. 아직은 내가 감당 못할 무언가를 겪기엔 준비가 안된 것 같았어. 남자애들이랑 친구 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라 그게 좀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 여자애들과 친구를 하려니 너무 복잡한 감정선 때문에 맞춰주기가 힘들기도 하고, 그렇다고 이성적인 관계를 생각하자니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아.
아직은 혼자가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