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집에
세 달쯤 전이었어. 그날은 점점 해가 짧아지고 유난히 노을이 길게 늘어진다고 느껴지는 날이었지. 우리 집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하교하고 집으로 가면 집에 아무도 없을 때가 많았어. 그 날은 학원 수업이 없는 날이기도 했고 형은 야자를 하고 왔기 때문에 그야말로 나만의 자유시간이었지.
그래서였을까. 아무도 없이 고요한 집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꽤 신선했어. 일 년에 며칠 없는 날이니까 말야.
집에 가니 정말 아무도 없었어. 원래 이 시간쯤이면 큰 방에서 나를 반기며 나오시는 엄마, 컴퓨터에 앉아있는 형이 없으니 허전하기도 했지만, 뭔가 진정으로 나만의 시간이 생긴 기분이었어. 컴퓨터도 비어있고 안방에 있던 TV도 내 차지고 햇살이 한껏 들어오는 거실의 소파도 여유로 가득 차 있고. 뭐랄까 내가 너무 많은 자유로운 선택지가 주는 풍족함에 선택 장애가 왔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난 얼른 옷을 갈아입고 과자를 한 봉지 들고는 안방의 TV로 갔어. 이것저것 보다 보니 야구를 하고 있길래 그걸 보기 시작했지. 마침 롯데 게임이기도 했고 워낙 야구 중계에 관심이 없다가 최근 들어 중계를 보기 시작한 터라 좀 재미가 붙었어.
그렇게 TV를 보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제 날이 꽤 어두워졌더라. 완전히 저녁이 된 건 아닌데 이제 한 30분만 지나면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되는 때였던 것 같아. TV를 끄고 나오니 형과 함께 쓰는 침실과 화장실의 닫힌 문이 노을의 끝자락이 비춰주는 희미한 빛에 비쳐 조금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어. 그래도 지금 우리 집엔 나 혼자니 집을 잘 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난 원래 컴퓨터 게임을 자주 하진 않았어. 집에 있는 게임 디스켓은 거의 다 해보기도 했고 끝판까지도 다 깬 게 대부분이라 딱히 나의 모험심을 자극하진 않았어. 그리고 삼국지는 뭐랄까.. 재밌어 보이긴 하는데 아주 하고 싶어서 달려들 정도는 아니라고나 할까. 그래서 컴퓨터는 그냥 내버려 뒀어. 그리고 엄마, 아빠가 내가 초등학생 때 일본에 가셨다 사 오신 'awia'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냈지. 최근 내 관심사는 단연, 음악이었거든. 팝과 브릿팝 그리고 로큰 롤에 한창 빠지고 있는 중인데, 2년 전에 나왔던 머라이어 캐리의 앨범인 'Day dream', 영국의 Take that과 비틀즈를 즐겨 듣고 있어.
카세트 플레이어에 머라이어 캐리 카세트를 넣고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가사집을 꺼냈어. 노래를 따라 부르려고 이어폰은 한쪽만 꽂았어. 곧 감미로운 선율과 머라이어의 강렬한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쏟아져 나왔지. 그렇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했어. 그 누구의 간섭 없이 하고 싶은 걸 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지.
한창 가사집을 보며 세 번째 트랙을 따라 부르는 중이었어. 거실에는 노을의 끝자락이 집 안으로 들이치다가 점점 옅어지는 중이었고 조금씩 어두워지는 저녁의 기운이 사방을 어둑어둑하게 채색하는 중인 여하튼 그런 늦은 오후가 끝나는 중이었지.
'탁-'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적을 깨고 전혀 예상치 않은 소리가 이어폰을 빼둔 오른쪽 귀를 통해 선명하게 들렸어. 뭐랄까, 이런 분위기, 이런 상황과는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도 없는 집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예상치도 못한 소리가 들렸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겪어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거야. 일종의 공포 직전의 감정과 비슷했어. 하지만 그 감정은 당연하게도 곧 엄청난 공포로 변했지.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이 날 난 집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방(공부방)에 있었는데 그 방 옆으로 부엌이 있었고 그 옆으로 침실이 있고 침실 오른편으로 90도 꺾은 곳에 화장실이 그리고 화장실 옆이 안방이었어. 아까 내가 야구중계를 보던 곳 말이야. 즉, 화장실부터 내가 있던 공부방까지 오려면 침실과 부엌을 지나와야 하는 짧은 복도와 같았는데, 지금 그 복도를 따라 무언가가 다가오는 중이었던 거야!
'스르륵 스르륵'
마치 긴 드레스를 입은 여자귀신이 자신의 옷을 질질 끌면서 오면 날 것 같은 그런 소리였어. 그리고 그 소리가 복도를 지나 내가 있는 방으로 천천히 다가온 거란 말이야!
당혹감이 120% 공포로 바뀐 후 몇 초 간은 뭘 어떡해야 할지 몰랐어. 갑작스러운 공포로 얼굴까지 피가 거꾸로 치솟아 달아오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지. 세상에, 그런 공포를 느껴본 건 처음이었어.
그래서 곧바로 기도를 했지. 성당을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내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 그러니깐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좀 가시더라. 그리고 대책을 찾기 시작했어. 스르륵 거리며 옷을 끌고 내게 다가오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이대로 있다간 뭔지도 모를 귀신에게 당할 것 같았어. 온몸과 얼굴은 소름이 돋듯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다시 들며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더 이상 앉아서 기도만 할 순 없었어. 이젠 뭐라도 좋으니 행동으로 옮길 차례였지.
순간, 책상 두 번째 서랍에 있던 스미스&웰슨 비비탄총이 생각났어. 이런 위급 상황을 대비해 항상 탄창을 가득 채워두었거든. 혹시라도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언제라도 꺼내서 쓸 수 있게 말이야. 여튼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어. 지금 우리 집에는 나 혼자 있고 저게 귀신이든 뭐든 나가서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어. 온몸에 돋은 소름은 쉽사리 가시 지는 않았지만 이젠 귀신을 물리쳐야겠다는 투지가 두려움을 넘어섰어. 내겐 가족을 대신해 지켜야 할 집이 있고 나의 기도를 들으신 신이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용기가 차올랐어. 때마침 스르륵 소리도 잦아들며 방 근처에 까지 왔다고 짐작이 될 즈음이었어. 귀신인지 뭔지는 바로 방 근처에 있다고 여겨졌지.
서랍에서 매트한 은회색의 스미스&웰슨 비비탄 권총을 꺼내 장전했고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후 튀어나가듯 방 밖으로 뛰어나가 왼쪽으로 돌며 총을 겨눴어.
그. 런. 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본 나는 방금 전까지 엄청난 소름과 긴장감에 휩싸여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내가 무색해질 정도의 허무함에 그냥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어. 왜냐하면.. 귀신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다름 아닌, 화장실 옆 빈 벽에 걸려있던 '실내용 미니 농구대'였던 거야.
농구대는 못 두 개로 빈 벽에 걸려있었는데 두 개의 못 중 왼쪽 못 하나가 예전부터 몇 번 빠진 적이 있어서 손으로 빼면 빠질 정도로 헐거워져 있었거든.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손을 댄 적도 없는데 그 못이 빠지면서 다른 못에 걸린 채 벽에서 진자 운동을 하듯 양쪽으로 움직이며 마찰음으로 '스르륵 스르륵' 소리를 냈던 거야. 즉, 귀신이 소복을 입고 옷을 끌며 다가왔다고 생각했던 그 소리는 미니 농구대가 벽에 달랑거리며 낸 소리였던 거지.
긴장이 풀리며 허무해진 나는 그래도 안도감과 함께 잠깐 농구대를 바라보다 허탈함에 웃음이 났어. 그래서 그냥 비비탄 총으로 농구대를 향해 두 번 정도 쐈어. 탕. 탕.
'니였나?'
난 다시 비비탄총을 집어넣고 농구대를 못으로 고정한 뒤 집안을 둘러봤어.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저녁이 되었지. 귀신 소동은 끝났지만 다시 어둠이 찾아오니 뭔가 오싹하더라. 그래서 방, 거실, 부엌의 모든 불을 켜놓고 가족을 기다렸어. 부모님과 형은 모를 거야. 스르륵 소리가 울려 퍼지던 나 혼자 있는 집의 공포와 긴장감을 그리고 농구대 해프닝으로 끝난 이날의 허탈감과 안도감을.
원효대사 해골물도 이런 이치잖아? 세상은 확실히 마음먹기에 달렸나 봐. 잠시 후 형이 집에 오고 엄마, 아빠도 오시고 그야말로 평범한 저녁이 되었어. 일상의 소중함이 느껴졌고 귀신 소동은 그렇게 끝이났지.
그런데 여전히 좀 이상하기도 해, 가만히 있던 못은 갑자기 왜 빠졌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