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친구들도 그런 줄 알았는데 바로 집으로 가는 친구도 있더라. 어찌나 부러운지 나도 학교를 파하면 그냥 집에서 과자나 먹으면서 TV를 보거나 혼자 공부를 하거나 하는 게 좋은데 말이야. 그런데 초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수학도 너무 어렵고 영어도 배워야 하고 하니 부모님은 날 동네의 영수학원으로 보내셨지. 하긴, 초등학생 땐 컴퓨터 학원과 피아노 그리고 주산 학원을 동시에 다닌 적도 있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낫긴 해. 학원에는 초등학생 때 나랑 친했던 친구도 있고 아예 서로 다른 학교만 다녀서 모르는 애들도 많았어. 그런데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어도 같은 반이 아니었거나 혹시 같은 반이었어도 어린 시절 극도의 예민함이나 소심함 때문에 같은 반 내내 전혀 한마디도 안 한 친구들도 종종 학원에서 보였어. 물론 딱히 인사를 하진 않았는데, 내가 알던 애가 아닌 것 같을 정도로 쾌활한 모습을 보면 놀라곤 해. 쟤가 저렇게 장난도 잘 치고 밝은 아이였나 싶은 거지. 그런데 학교에서도 유난히 조용해서 존재감은커녕 같은 반 친구들을 피하고 다니는 애들도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걔들을 학원에서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왤까. 하긴 걔들은 걔들 동네 학원을 다니겠지.
아무튼 난 영어랑 수학을 배웠는데 남학생, 여학생을 포함해서 열 다섯 명 정도가 같은 반이었어. 거의 대부분 다른 학교였어. 개중 몇몇은 나랑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친한 녀석들이 아니다 보니 인사는 해도 같이 앉진 않았어. 알지? 얼굴은 아는데 같이 앉기엔 좀 그런.. 여튼 그래서 주로 혼자 앉았어. 인수가 있다면 같이 앉겠지만 인수는 우리 동네에서 꽤 먼 곳에 살아서 좀 아쉬웠지. 같은 반에 지윤이라는 여자애가 있어. 나랑 초등학교도 같이 나왔고 5학년 때 같은 반도 한 적이 있는데 3년 만에 보니 많이 달라져있었지. 같은 반 일 때도 딱히 친하진 않아서 가끔 마주치면 어색하게 인사나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그래도 지금 수학반에서 내가 얼굴을 아는 유일한 학생 중 하나라서 이 반에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이긴 해. 웃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를 하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되었다는 거야. 한 학기를 넘기 학원을 다녔는데 여름 방학이 지나서야 인사를 했었으니까.
그것도 좀 웃겼어. 그러니까 8월 말이었나? 수학반 친구랑 실없는 농담이나 하면서 한참 웃다가 수업 시작종이 울려서 수학반 문을 촥-하고 열었는데 지윤이가 새우깡을 봉지채로 들고 먹으면서 문 앞에 있는 거야. 처음으로 완전히 마주친 날이었어. 난 교실로 들어가는 중이었고 걔는 나오는 중에 마주친 거지.
"아, 안녕?"
반에서 유일하게 아는 두 명 중 한 명이니 전부터 인사를 할까 말까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조금 긴장 섞인 말투로 인사했어. 머리를 올백으로 묶어 뒤에 길게 늘어뜨린 그.. 뭐라더라 포니테일? 여튼 그런 머리에 블랙진 바지와 블랙진 점퍼를 즐겨 입는 걔는 그날도 비슷한 스타일이었어. 난 패션이나 스타일이 뭔진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걘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 아이였지.
"어, 안녕? 니 월영 나왔제?"
아휴, 얘가 갑자기 질문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잖아. 난 그저 인사나 하고 지나갈 생각이었다고!
"자, 이거 무라." 아무튼 지윤이가 갑자기 새우깡 봉투 채로 나한테 내미는 거야. 그래서 얼떨결에 한 주먹을 쥐었지.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데 그냥 쌩-하고 지나가더라.
가끔 여자애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는데 이런 것도 비슷해. 난 분명히 내가 생각한 대화의 시작과 끝이 있는데 여자애들은 시작도 끝도 내 예상 밖일 경우가 많아. 지윤이도 그랬어. 곧 수학 쌤이 들어오셨고 새우깡을 한 주먹 쥔 나는 쌤의 놀림감이 되었어.
"디와이, 니 수업 시작했는데 뭐하노? 혼자 물라고 손에 쥔 거 봐라. 으이구-"
수학쌤은 꽤 웃긴 분이야. 다른 사람이면 별로 안 웃긴 얘기도 쌤이 하면 웃겼지. 그래서 쌤의 한 마디에 애들은 전부 날 쳐다보며 한바탕 웃었어. 그때 지윤이가 들어왔고 난 지윤이한테 얻어먹었다는 걸 어필하려고 갤 쳐다봤는데 빈 손으로 들어오는 거야.
"지윤이가.. 새우.."
"지윤이가 뭐? 이노무 짜슥이 어데 같은 반 친구한테 뒤집어 씌울라고. 니 다무라. 빨리 무라. 수업 시작하자."
난 여전히 한 손에 새우깡을 잔뜩 쥔 채, 빈 손으로 들어온 지윤이를 얼빠진 듯이 쳐다보는데 지윤이는 씨익하고 웃어 보이더니 바깥쪽으로 고개를 슬쩍 가리키더니 자리에 앉더라. 그래서 지윤이가 고개로 가리킨 곳을 봤는데 '아뿔싸' 새우깡을 사물함에 넣고 온 거였어. 그런데 난 새우깡을 주먹에 쥐고 있잖아? 그래서 얼른 한 입에 다 넣고 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물오물 다 씹어 삼켰지.
지윤이와 난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았어. 지윤이는 중간에 오른쪽으로 꺾어가고 우리 집은 좀 더 직진해서 가다가 큰 경찰서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 단지였어. 보통은 집에 갈 때 혼자 가는데 가끔 타이밍이 우연하게도 지윤이와 맞을 때가 있었어. 좀 서먹서먹하기도 하고 굳이 같이 갈 필요는 없는데 그렇다고 일부러 걔를 먼저 보낸 뒤 가는 것도 이상하고 또 빠른 걸음으로 가서 앞질러가는 것도 웃겼어.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같이 가고 있더라.
"니도 여기로 가나?"
어색함을 깨기 위해 바보같이 전부터 알고 있는 질문을 던졌어. 게다가 이미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잖아. 지윤이는 동그란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어.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수 분을 말없이 걸었어. 나도 앞으로 보다가 바닥을 보다가 슬쩍 지윤이를 보니 정면을 보고 잘 걷고 있더라. 곧 지윤이가 오른쪽으로 돌아갈 큰 내리막 길이 나왔어. 난 수학 시간 직전에 있었던 새우깡 얘기를 하고 싶었지.
"아까 새우깡. 사물함에 넣으러 간 거가?"
"응."
겨우 말은 꺼냈지만 더 할 말이 없었어. 응이라고 하는데 그럼 응인 거지.
"잘 먹었다."
"응."
"잘 가!"
"응."
지윤이랑은 학교에서도 그렇게 친했던 친구가 아니라서 더 어색했던 것 같기도 했어. 지윤이는 곧 내리막 길로 유유히 내려가고 있었고 나도 곧장 직진해서 집으로 갔어. 이래저래 여자애들이랑은 친해지기 힘들다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