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때 2인 1조로 가족과의 여행 수행과제 기억나? 난 그 과제를 보자마자 머릿속이 하얘졌거든. 학교에서는 엄마로 인한 아픔을 꾹꾹 눌러 담고 겨우 지내고 있었는데 ‘가족’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과호흡이 올 정도로 당황스러움에 어지러울 지경이었어. 그런데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네가 달려왔잖아. 너네 가족이랑 같이 가면 안 되냐고.’
‘아, 맞아. 그랬지. 어차피 양 가족이 다 시간이 안되면 한 가족에 친구가 붙어서 같이 가도 되는 조건이었잖아? 난 우리 엄마, 아빠에게 널 정말 소개해주고 싶었거든. 넌 정말 예쁘고 똑똑하고 자랑스러운 친구라, 솔직히, ‘승희가 내 친구야!'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꽤 컸어. 물론, 내가 널 정말 좋아한 게 먼저지만..’
‘덕분에 난 몰래 숨긴 가족사를 들킬 위험도 모면하고 또.. 너네 엄마, 아빠와 널 보면서 저렇게 온 가족이 얘기도 잘 통하고 화목할 수 도 있다는 걸 책이 아닌 실제로 처음 보기도 했어. 가족의 따뜻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지.’
‘이것 말고도 꽤 많아. 횡단보도에서 폐지 할아버지가 손수레를 놓쳐서 난리 난 거 기억나? 그땐 나도 속으로 좀 망설였거든 한창 마음에 여유가 없던 시절이라. 그런데 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가더라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차를 멈추고 할아버지를 도왔잖아.’
‘아.. 그거, 그건 너도 같이 한 거잖아.’
‘암튼 그리고 네가 버스 정류장에서 주은 지갑을 찾아줘서 고 3 언니가 엄청 울었던 거 기억나? 그 지갑 안에 그 언니 다음 달 생활비랑 1년을 모은 등록금이 있었다잖아. 다음 해에 대학교에 가려고 모아뒀다던.. 그거 없었음 방을 뺄 수 도 있었데. 네가 그걸 찾아줬어. 그 언니의 삶을 구해준 거야.’
승희는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사소한 행동들을 하나둘씩 꺼내 놓았다. 문득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대학 졸업 후 난 취업을 위해 달리며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왔다.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치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첫 직장에서의 경험과 아픔을 뒤로하고 몇 번의 면접 끝에 들어간 두 번째 직장에서 난 5년 간 매주 주어지는 업무를 겨우겨우 해내며 살아가던 평범하다 못해 사소한 존재감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나의 삶은 무미건조한 무채색으로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내가 꿈꾸던 화려한 비상은커녕 일상이 사소한 업무들로 비상인 상황에 사로잡혀 생의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내는 하루살이 정도의 존재감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넌 너무 잘 살아왔어. 너무 대단해. 그래서 고마워. 알게 모르게 네가 한 선행들, 친구를 향한 넓디넓은 마음 씀씀이, 무의식적인 배려, 폐를 끼치치 않으려는 행동, 그 모든 게 어딘가에 쌓이고 있어. 그리고 그 말과 행동에 대한 보상은 다시 누군가를 통해 네가 받거나 또 다른 누군가가 전하게 될 거야.’
‘승희야..’
‘난 이 말을 해주려고 왔어. 그 사람도 마찬가지야.’
‘성수동 그 사람 말이지?’
‘둘이 잘 만나고 있어서 너무 좋아.’
‘정말 네가 한 거니? 이 모든 메시지와 만남까지도..?’
‘응. 지구에서의 내 짧은 인생에서 나보다 더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은 엄마 같은 사람은 딱 둘이었는데, 그게 너랑 그 사람이야. 그래서 둘은 나처럼, 인생의 허무함이나 한계에 너무 매몰되지 않고 순간의 소중함과 즐거운 행복감을 누리고 즐기길 바라는 마음이야. 사실, 살아보면 인생은 또 그렇게 지루하게 길지도 않거든. 그래서 살아볼 만 해.’
순간, 불현듯 승희가 갑자기 떠나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아직 승희와 할 얘기가 더 많은데, 궁금한 건 제대로 묻지도 못했는데 나도 몰랐던 나의 과거만 알려준 채 그녀가 사라져 버릴까 봐 마음이 급해졌다.
‘승희야, 그래서 넌 지금 어디에 있는데? 한 번만 나와주면 안 돼? 네 모습,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역시 넌 영감도 뛰어나. 내가 곧 갈 거란 걸 어떻게 알았데? 하하.’
승희의 호쾌한 모습이 이젠 날 더 슬픈 예감으로 몰고 갔다. 시각은 어느덧 새벽 여섯 시를 지나고 있었고 내 마음의 불안은 확신이 되고 있었다.
‘자, 날 따라서 하나, 둘, 셋까지 세어줘.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숫자를 다 세자마자 머리가 핑 돌았다. 종종 오래 동안 앉아있다 갑자기 일어설 때 느끼는 어지러움과 비슷했다.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그대로 소파에 기대 정신을 잃듯 잠깐 쓰러졌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난 잠들거나 정신을 잃지 않으려 집중했고 곧 눈앞이 밝아지며 정신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 사이 시간은 오전 일곱 시가 되어 있었다. 분명 소파에 기대었다가 일어난 것 같은 찰나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거의 한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승희야, 승희야?’
“승희야!”
난 머릿속으로 또 입으로 승희를 불러봤지만 더 이상 아무런 응답도 대꾸도 없었다. 늦은 밤부터 방금 전 이른 새벽까지 승희와 나눈 이야기는 너무나도 선명한 진짜 기억이었다. 이건 꿈일 수 없었다. 승희가 메시지를 보낸 건 그 사람도 알 테니 말이다. 난 애타게 승희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필이면 밤새 얘기한 게 문자 메시지가 아니라 생각으로 얘기한 거라 남아있는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단, 달라진 게 있다면 평생을 몰랐던 승희의 아픔 과거와 내가.. 내가 그 아이에게 위로가 되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다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누군가의 삶에 그렇게 큰 힘을 줄 수 있는 존재였다는 점이 그리고 그 힘을 나눠준 대상이 내가 좋아하는 아니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존경해마지않는 승희였다는 사실이 소름 끼치도록 놀랍고 기뻤다. 이토록 보잘것없는 내가, 내 인생의 스승과 같은 친구에게 그런 중요한 존재였다니.. 갑자기 내 삶이, 내 생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도 꽤 좋은, 꽤 괜찮은 존재,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꽤 쓸모 있는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사라진 승희에 대한 생각으로 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새벽 내내 그녀와 나눈 대화를 복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넋 놓고 생각에 잠겨있던 중 문득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출근을 위해 현관으로 달려 나가다 식탁 위에 처음 보는 카드가 하나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난 다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승희다, 승희야’
떨리는 마음으로 카드를 집어 들고 천천히 펼쳐보았다.
‘삶은 재미와 의미로 가득 차 있어. 이제 그 사람과 오랫동안 생의 모험을 즐기길. 종종 힘들면 날 찾아. 너의 즐거운 모험이 끝나면 우린 다시 만나 새로운 여행을 떠나게 될 거야.’
메시지를 읽고 난 그만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슬픔과 아쉬움의 눈물은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한쪽이 뻥 뚫려있던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승희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었다. 승희는 언젠가 만날 테니 그저 내 삶을 잘 살아내면 된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가방 속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누구의 전화일지 짐작이 갔다. 휴대폰을 꺼내기 위해 가방에 손을 넣었고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번졌다. 아침 햇살이 복도를 환희 밝히고 있었고 힘차게 열어제낀 문 위로 파란 하늘이 두 눈을 시원하게 맑혔다.
"여보세요?"
"하하하.. 네, 오늘 퇴근하고 만나요. 네네, 어제갔었던 거기요.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하하... 긴 얘기가 될 것 같아요. 네, 곧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