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른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아무런 번호도 남아있지 않았고 이름은 (알 수 없음)으로 되어있었다. 정말 유령이라도 되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세상 혹은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걸까. 정말 그런, 인간의 상식을 넘어선 또 다른 세상에 흘러들어 간 것일까.
“저도 받았어요..! 어 그런데..”
“승희요? 승희 메시지 말이죠?”
“네, 그런데 내용이 달라요..”
‘고마워요 그리고 잘 부탁해요. 짧지만 긴 시간이 흘러 우리 모두 다시 만나는 날까지.’
승희는 마치 우리의 일상을 시시각각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건지, 조금은 오묘하고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또 동시에 설레는 마음도 들었다. 그저 승희의 안부가 궁금했다.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유령이 있다면, 천사가 존재한다면 분명 이런 형태로 존재하지않을까하는 생각마저 강하게 들었다.
“답장을 보내면 답이 올까요?”
그 사람도 살아오면서 이런 미스터리한 상황이 처음이라 궁금증을 참기 힘들어 보였다. 자정이 다되어갈 무렵 역삼의 작은 동네 공원에 앉은 서른의 우리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밝고 푸른 미래에 두근대던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변해있었다.
“글쎄요.. 전 지금 승희가.. 승희가 다른 세상에 있다고 느껴지거든요. 그게 4차원의 세상인지,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 건지, 뭐라 설명을 할 순 없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나 논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곳 말이죠.”
“사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그냥 보내볼까요?”
밑져야 본전인 상황인데 왜 안될까 싶은 생각이 든 나는 다짜고짜 ‘승희야, 너 어디야?’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사람과 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몇 분이 지나도록 메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답장은커녕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또 삼십 분이 지나갔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그 사람은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 사람과 조금 더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응했다.
“여전히 답은 없네요. 그래도 승희가 우리 둘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는 건 굉장히 신기하고 재밌지 않아요?”
“그만큼 승희가 고등학생 때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기도 하네요. 부럽기도 하고 또 기분이 좋기도 하고.”
우리는 어느덧 나의 자취방에 도착했다. 그는 곧 집으로 돌아갔고 난 큰길 모퉁이를 따라 그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웅했다. 그는 채 백 미터가 되지 않는 길을 가는 동안 정확히 세 번 돌아보았고 난 그때마다 팔을 크게 들어 올려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우리는 여전히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마치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이 된 기분이었다. 순간 어색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사람 역시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려 흔들며 심하게 좋아하는 것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승희가 바란 게, 의도한 게 이런 것이었을까. 정말 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순간 왼손에 움켜쥔 휴대폰에서 가벼운 진동음이 울렸고 덩달아 심장이 내려앉듯 놀란 난 이건 분명히 승희에서 게 온 메시지라는 것을 직감했다.
‘맞아. 내가 너무나 바랐던 일이야. 그리고 이제 너도 나도 또 다른 긴 여정이 시작될 거야.’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반가움과 동시에 조금은오싹한 기분도 들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입 밖으로 내뱉은 말도 아닌 나의 생각을, 나의 느낌을 머릿속에서 읊었을 뿐인데.. 승희가 메시지로 대답한 것이다. 그렇다면 승희는 지금 내 모습이 보이는 정도를 떠나 나의 생각까지 손바닥 보듯 훤히 볼 수 있다는 걸까. 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빌라 근처를 돌아다니며 혹시라도 사람이 있을 법한 공간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승희는 정말 이 세상에 있지 않을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은 점점 현실이 되어갔다.
‘승희야, 너 지금 어디야? 혹시 내게 설명하기 힘든 그런 곳에 있어? 정말 네가 원하던 그런 곳이야? 이 세계를 초월한.. 그런 곳에 있는 거지? 난, 난 그냥 네가 보고싶고.. 또, 걱정돼서’
집으로 들어온 난 집안의 모든 등을 끄고 침대 등만 켠 채 벽을 대고 침대에 걸터앉아 승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왠지 이제는 금방 답이 올 것만 같았다. 그토록 바라고 꿈꿨던 승희와 다시 예전 고등학생 시절처럼 수다도 떨고 깊이 있는 얘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전히 무서운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의 메시지 덕분에 온몸의 세포가 정확히 십 년 전으로 날 돌려보내는 것 같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도 조명 덕분인지 기분 탓인지 그때랑 비슷한 모습으로 날 비치고 있었다.
‘나야. 나 왔다!’
휴대폰의 메시지를 뚫어져라 보던 난 숨이 막힐듯한 반가움에 순간 얼어버리고 말았다. 승희가 딱 그 시절 그때의 말투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더 신기한 건 승희가 내 생각을 읽는다는 것이었는데 신기해할 틈도 없이 너무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횡설수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드디어 그녀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잠깐, 넌 아마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마치 내가 너 사는 모습을 다 볼 수 있고 생각도 다 읽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냐. 물론, 지금은 네 생각과 휴대폰의 메시지로 이렇게 얘기를 할 순 있지. 우리는 지금 연결되었거든.’
‘연결? 아몰라. 내가 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데.. 우선 미안하다. 나도 대학교 입학하고 그땐 대학 친구들과 지내느라 그리고 지금은 직장 생활하느라 내가 널 깜빡했다. 까먹었어.. 미안해. 그런데 살아보니까, 지금 내 삶이, 서른이나 먹고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이 삶을, 어쩌면 넌 다 예상했을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 그래서 더 얘기하고 싶었어. 살아가는 이야기들 그냥 그때처럼 주절주절 얘기하면 다 풀리지않을까. 그런데, 너 혹시 내가 이렇게 살걸 이미 예상해서 넌 서른까지만 살고 싶다고 했던 건가..?’
‘꺄하하. 너 그거 기억하는구나. 그런데 나 그 말하고 금방 다시 주워 담았잖아. 지금에 와서 보니 나도 아는 척, 깨달은 척, 초월한 척만 했지 정말 초월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 그냥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종교를 가져봐도 항상 세상에 대한 허무한 마음이, 이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기분이 단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서 그랬었어. 그래서 더 많이 공부하고 파고들고 그랬던 거야. 나 대학교에 가서도 그랬거든. 알잖아? 대학 생활도 별거 없다는 거.’
승희였다. 정말 승희였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과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지만 막상 이 순간이 되니 뭘 먼저 물어야 할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이 새하얀 도화지가 된 것 같았다.
‘승희야, 그때도 충분히 느꼈지만 넌 정말 대단한 아이야. 네가 말로는 초월한 척했다고 해도 내 눈에 넌 정말 세상을 초월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구들 때문에 괴롭고 갈등하던 때도 넌 항상 내 얘기를 다 들어주고 현답을 알려줬어. 행동으로 보여준 거지. 정말 대단했어. 지금도 여전히 대단해.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 네가 어디에 있고 도대체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되었는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아. 그저 우리가 긴 시간과 다른 공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과 결국 다시 연결되었다는 게 더 중요해. 넌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선생님 같은 사람이야. 이제 서른이나 되었는데도 아직도 너한테 기대기만 한 것 같아서 미안하네. 나도 도움이 되고 싶다. 누구를 도울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 난 아직도 그냥.. 애 같아. 학생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신나게 대화를 주고받던 우리의 대화는 나의 마지막 메시지 이후로 잠시 뜸이라도 들인 듯 조용해졌다. 한창 너무 들떠 즐거운 마음에 주저리주저리 내 얘기만 하다 보니 연결이 끊긴 걸까. 난 속으로 또 입 밖으로 그녀를 불러보았다. 여전히 답이 없이 잠잠한 메시지 창을 침대에 두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와보니 전혀 상상도 못 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넌 모를 거야. 내가 너에게 얼마나 기댔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마음의 위로를 받았는지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