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얼떨떨하다 못해 조금은 어색한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승희에게 도움이 되었었다니 학생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도저히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난 과거를 쭉 돌이켜보았다. 고등학생이 되어 승희를 처음 본 날부터 십여 년 전 대학생이 된 후 일 년에 두세 번 보다 연락이 끊길 때 까지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내가 승희를 위해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한 건 하나도 없었다.
처음엔 승희의 놀라운 미모에 기가 죽다 못해 경외의 마음이 들었다. ‘저런 아이랑 친해지면 어떤 기분일까?’, ‘쟤랑 친해지고 싶은데 안 놀아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게 정말 엊그제 같다. 이후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고 몇 번 같이 밥도 먹다 보니 세상에 이렇게 성격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공부는 또 어찌나 잘하던지 모르는 문제가 없었고, 인성은 또 얼마나 좋은지 친구, 가족 등 관계와 관련된 모든 고민을 다 들어주고 종종 현답도 제시해주던 그녀였다. 이런 승희에게 내가 도대체 어떤 도움을, 어떤 위로를 했다는 말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승희야,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참 고마운데.. 난,’
‘네가 없었다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어땠을까? 오히려 난 이렇게 생각해.’
승희가? 승희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이후 오랫동안 승희로부터 전혀 뜻밖의, 상상도 못 한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교 3학년쯤에 처음으로 왕따를 당했어. 그전까지는 정말 친하던 친구들이었거든. 학교 생활도 너무 재밌었고. 그런데 무슨 이유였는지 친구 둘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같이 놀던 나머지 넷도 슬슬 나를 피하는 거야. 눈치챘지. 얘네들 뭔가 있구나. 처음엔 엄청 파고들었어. 도대체 이유가 뭔지, 내가 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와 주는지. 졸업 전에 친구 중 하나가 슬쩍 알려주더라. ‘네가 너무 잘나서 갑자기 짜증이 났어, 얼굴도 예뻐, 성격도 좋아, 키도 커, 집도 잘 살아 근데 공부도 전교에서 놀고.. 우리 모두 급 현타가 와서 그랬어. 미안, 잘 지내’ 이렇게 말이야. 하하. 참, 너 알지? 내가 관계에 대한 책도 많이 읽고 철학 서적도 파고들고 그러다 보니 영의 세계와 우주의 끝에 대한 궁금증까지 그런 주제들 좋아하는 거. 원래 좋아했지만 그 이후로 미친 듯이 파고들었어. 천주교, 개신교, 불교 심지어 몇몇 의심스러운 사이비 종교도 찾아가 보고 유명하다는 무속인들도 만나봤는데 속 시원한 답은 나오지 않더라.'
승희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그 시절처럼 청량하게 들렸지만 왠지 모르게 그 목소리 속에 내가 정말 몰랐던 아픔과 고통이 서려있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냥 내가 잘나고 다 잘해서 싫어졌대. 이걸 어떻게 이기니? 하하하.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엄마의 병세가 심각해진 거였어. 그렇게 상황이 안 좋아지시고 하늘나라로 가시기까지 채 일 년도 안 걸렸지. 이 세상에서 나의 정신세계를 받아주던 유일한 나의 구세주, 내 마음의 영원히 포근한 보금자리가 사라져 버린 거지. 보통 다들 그러잖아. 나의 어리석고 바보 같은 모습, 어리광을 받아주는 유일한 존재가 엄마잖아?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넋을 놓는다는 표현을 처음으로 겪어본 순간이었지. 이때가 고등학교 1학년 때야.’
‘뭐야.. 너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 왜.. 말 안 했어..?’
‘바보 같아 보이겠지만 두려웠어. 내가 아무리 잘나도 날 싫어할 수 있는게 세상인데, 이런 세상 속에서 날 유일하게 이해하고 지켜주는 나의 가장 든든한, 하늘 같은 존재였던 엄마가 사라지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에 압도당했던 거야. 돌이켜보면 슬프고 아팠던 마음보다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아. 엄마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또 누가 날 엄마만큼 받아줄까..’
머리가 멍해지더니 곧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각은 새벽 네 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그 어떤 현실의 굴레도 승희와의 지금 이 시간을 막을 순 없었다.
‘이후에 새엄마와 새엄마네 언니 둘이 들어와 같이 살았어. 내가 집을 나오기 전까지 3~4년은 같이 지냈구나. 아빠도 힘들어했거든. 새엄마는 아빠의 지인이 소개해준 사람이었고 그렇게 큰 집에 둘만 있기엔 너무 허전하긴 하셨을 거야. 지금은 아빠를 아주 이해 못 하는 건 아냐. 그런데 당시엔 좀 너무하다는 생각은 있었지.’
‘승희야, 너.. 너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구나. 미안해, 난 그것도 모르고 그때 너한테 응석부리고 기대기나하고 친구랑 다퉈서 속풀이나하고 그랬는데 난 정말 그때나 지금이나 너한테 도움만 받고 있네. 넌 그렇게 상상도 못 할 만큼 큰 일을 겪고 있었는데.. 참, 나 바보 같지?’
승희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 말할 준비라도 하는 것 마냥 뜸을 들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넌 마치.. 우리 엄마 같았어.’
곧 내뱉은 승희의 말에 난 온몸이 얼어붙는 듯 소름이 돋았다. 오싹함이나 두려움에 의한 소름이 아니라 전혀 예상 못한 한마디로 인한 놀라운 소름 말이다.
‘승.. 승희야. 내가 무슨.. 에이, 말도 안 돼. 너 지금 일부러 나 듣기 좋으라고..’
‘고1 때, 1학기 초에 기억나? 우리가 막 친해지기 시작할 때, 난 집에서는 거의 반 미친 사람처럼 울며지냈고 학교에 오면 아무 일 없는 척, 아주 잘사는 척 살았거든. 그런데 엄마처럼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어. 넌 내가 고대의 철학자에 관한 현학적인 이야기를 해도, 우주의 탄생과 미래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아도, 종교의 힘과 한계에 대한 내 견해에도,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항상 한결같이 재밌게 들어줬어.’
‘그거야. 나도 널 좋아하고, 내가 관심도 있는 분야인데 네가 정말 많이 알고 있고..’
‘엄마와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한 번 꺼내면 거의 대부분 이랬거든. ‘아 뭐래, 딴 얘기하자.’ 이렇게 말이야. 약간 괴짜를 바라보는 눈빛 그거 알지? 그런데 너랑 우리 엄마랑 가장 비슷한 점이 뭔지 알아?’
난 그냥 천천히 고개를 젓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 두 눈을 마주치고 입으로는 종종 감탄사도 내뱉고 또 가끔 대답을 할 때도 나의 이야기를 믿고 이해하고 더 도와주겠다는 투의 상냥함으로 가득해있어. 거기에 내 쪽으로 몸을 반쯤 기대거나 숙여서 얘기를 들어주는 거, 이게 우리 엄마랑 똑같아.’
나는 그냥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였고, 내가 마음으로 정말 많이 기댔고 또 배울 점이 너무 많으니까.. 그냥 내게는 당연한 일이었는데 승희가 그렇게 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전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종종 먼저 그런 주제들로 내게 한 마디씩 물어봐주는 것, 그거 역시 엄마랑 너 밖에 없었어. 그래서 엄마를 그렇게 보내고 뻥 뚫린 가슴으로 지냈는데도 학교를 가면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어. 네 덕분에, 너랑 있으면 엄마랑 있는 것 같았어. 죽어가던 내 삶이.. 네 덕분에 연장되는 것 같았어.’
나 덕분이라고? 나 덕분에 이겨냈다고..? 여기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난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승희의 엄청난 고백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