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은 곳으로

by Rooney Kim


“너무 뜬금없었죠. 평소 저와 친하긴 했지만 단 한 번도 가족의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었고 같이 술을 마신적은 더더욱 없었거든요. 그냥 이상한 날이었어요. 아무튼 승희는 그 말만 남긴 채 술자리를 떠났어요. 곧 햄버거를 사러 갔던 친구가 돌아왔는데 승희가 집으로 가버린 걸 알고는 굉장히 실망했죠. 저도 뭔가에 홀린듯한 기분이 든 날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그날은 마치 사진기로 찍어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그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과연 힘든 일을 털어놓는 승희의 표정은 어땠을까. 매번 나를 일깨우는 현명한 말과 행동만 보여주었던 승희의 고민과 좌절 그리고 슬픔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승희에게는 고민 따위는 없을 것만 같았다. 당연히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조차 한 적이 없었으니 그 시절의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랬던 그녀에게도 아픔이 있었다니, 상상도 못 한 가족사가 있었다니,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그런 일들을 겪었었다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승희는 그런 구구절절한 삶의 아픔과 고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미모와 놀라운 언변과 지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서른 해의 삶을 살아온 지금까지 승희는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인성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겸비한 너무나 특별한 아이였다. 그런 승희에게도 아픔이 있고 숨겨진 가족사가 있다는 게 그저 어색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런데 왜.. 왜 나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걸까. 비록,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다른 대학교로 진학했지만 이후 1년 간은 종종 만나 안부를 물었는데 왜 그때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 궁금한 마음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승희에겐 내가 그 정도의 위로가 되는 버팀목은 아니었나보다. 하긴 그땐 내가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고 위로를 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도 못했었으니. 나 자신을 감당하는 것조차 버거울정도로, 여유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괜히 이 사람이 부러워졌다. 난 승희에게 단 한 번도 내어 준 적 없는 위로의 곁을 이 사람은 내어줄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어떤 느낌일까. 태산 같은 사람의 넋두리를 들어준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선지자 같은 아이가 내게 고민을 얘기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어쩌면 그토록 좋아했던 그녀에게 바란 단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면, 내가 그녀에게 푹 빠져 수많은 감명과 위안을 얻었던 것처럼, 나도 그녀에게 단 한 번의 힘이나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내 눈에 그녀는 모든 것이 완벽했고 내게 그런 기회는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 승희는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어요. 휴학을 했다는 소문도 자퇴를 했다는 말도 들었지만, 행정적으로 처리된 건 하나도 없었죠. 그냥 자취를 감췄어요. 2년간 다닌 학교에서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거죠.”


그때 문득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녀의 한 마디가 생각났다.


‘서른까지만 살고 떠날 거야. 더 이상 넓어질 시야가 없거든. 더 배울 게 없으면 더 살 가치가 없어.’


돌이켜보니 세상 그 누구보다 밝고 맑고 통찰력이 있던 아이도 아주 가끔 시니컬한 말로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하곤 했었다. 따지고 보면 승희가 내게 이런 모습을 보인 건 답답한 자신의 가슴을 그나마 조금 열어 보여준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까지만 살고 간다고요? 죽는다는 말인가요?”


솔직히 그땐 떠난다는 말의 의미를 죽음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당시 서른까지는 여전히 십 수년의 세월이 남았었고 우린 아직 어리니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것 같긴 한데,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똑똑한 아이가 설마 서른까지 살고 정말 죽고 싶었을까요? 그리고 우리 모두 최근에 승희에게 손편지를 받았잖아요?”


그랬다. 승희는 어쩌면 내게 조금 기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삼 년의 학창 시절 동안 서너 번도 되지 않는 넋두리였지만 그녀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이미 깊은 허무에 빠졌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난 전혀 짐작조차 못한 그녀의 가정사도 있었으니 뭔가 내가 몰랐던 그녀의 세계에 대한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 승희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당연히 어딘가에 살아서 지내고 있는 거겠죠? 우리에게 이렇게 편지도 보내고 채팅방에 들어와서 글도 남기고.. 이건 물리적인 메시지들이잖아요?”


그의 질문은 곧 나의 물음이기도 했다. 우리는 답을 알 수 없었고 궁금증과 그리움은 커져갔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승희는 더욱 미스터리한 사람이 되어갔다. 최근 몇 개월 사이에 내 삶의 루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나의 멘탈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아이. 승희를 못 본 지 십 년이 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놀라운 아이다.


“승희의 존재 자체는 미스터리하지만, 그녀가 의도한, 의도한 게 맞겠죠? 아무튼 그녀가 의도한 대로 우리 둘은 이렇게 만나서 친해지고 결국 또 승희에 대한 이야기 꽃을 끊임없이 피우고 있네요. 하하, 이것도 그녀가 설계한 걸까요?”


“그렇.. 겠죠?”


곧 식당이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벌써 두 번째 심야 데이트다. 비록 승희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지만 우리는 이제 각자의 삶 속에서 그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친하다는 느낌이 이토록 정겹고 든든한 기분이었나 새삼 기분이 말끔히 상쾌해졌다. 그리고 어쩌면 이 호감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면 다음 단계로 가지 않을까 하는 자연스러운 생각에 닿았다.


“오늘은 제가 데려다 드리면 안 될까요? 밤도 늦었고, 또..”


“좋아요.”


흔쾌히 대답했다. 나 역시 그와 당장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승희에 대한 이야기를 핑계 삼아서라도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와 그의 이런 감정마저도 그녀의 설계 속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지만 이내 더 고마워졌다. 이 모든 게 그녀의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덕분에 무미건조해져 칙칙해진, 목표와 방향을 잃은 내 삶에 영양이 듬뿍 담긴 비가 쏟아진 마냥 황폐했던 들판에 싱그러운 수풀이 돋아나고 높은 장대 나무들이 우거져 풍성한 숲으로 변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까톡’


역삼의 높은 언덕을 넘어 갈 즈음 이었다. 단문의 메시지가 도착했고 우리 둘은 눈이 휘둥그레져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줘서 고마워. 곧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또 긴 여행을 떠나야 해.’


승희가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vio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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