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그런데, 그럼 혹시 저는 어떻게 소개받으신 거죠? 전 사실 수진이가 하도 졸라서 그냥 나갔었거든요.”
“저도 그게 좀 신기했어요. 수진이라는 친구는 대학 때 다른 과였고 얼굴만 아는 친구였는데요. 두 달 전에 갑자기 과 동기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수진이가 부탁하는데 꼭 이번 한 번만 만나보라고 해서. 그래서 나간 건데.."
“아, 그럼 수진이에게 물어봐야겠네요..!”
이미 밤 11시가 넘어 꽤 늦은 시각이었다. 그 사람과는 주말에 또 만나기로 했다. 서로에 대한 호감이 많이 생긴 것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무엇보다 승희라는 강력한 공통분모를 발견하다 보니 그녀를 통해 서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와 풀어야 할 미스터리가 있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막차를 몇 개 남겨둔 시점에서 지하철을 탔고 우리는 이제 다가올 주말의 만남이 단순히 반복되던 애프터가 아닌 본격적인 데이트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문득, 수진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알고 나에게 연결을 해주었는지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애 낳고 바쁜 와중에도 수진이도 승희와 종종 연락을 하고 있었던 걸까 하는 의구심이 어쩌면 수진이에게 그녀의 근황에 대해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닿았던 것이다.
‘너무 늦은 밤에 미안한데. 수진아 혹시 너 성수동 그 사람 말이야. 어떻게 나한테 소개해준 거야? 원래 둘이 아는 사이였어?’
메시지를 보냈을 때는 이미 밤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육아에 시달리다 지쳐 쓰러져 자고 있을지도 모를 수진이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수분이 지나도 답이 없자 미안한 마음에 이 시각에 괜히 메시지를 보냈다는 생각마저 들 즈음이었다.
‘지이이이잉’
내일 아침쯤에나 답장을 기대하던 나는 수진이에게서 온 전화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괜히 연락해서 깨운 건 아닌가 하는 미안함이 더 커질 찰나였다.
“야아~~~ 너, 정말 너무 오랜만에 연락하는 거 아니니? 깔깔깔.”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수진이의 유쾌한 에너지는 도무지 따라잡기 힘들었다. 수진이의 에너지는 쾌활하다 못해 때론 내 기운마저 빼앗겨 홀릴 지경으로 사람을 들어다 놓는다. 그래서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난 전자석처럼 수진이의 목소리에 달라붙고 말았다.
“왜 그 사람이랑 잘되고 있어? 깔깔깔~”
“너, 안 잤니? 난 또 자고 있을까 봐. 너 애 키워서 연락하기가 조심스러웠거든.”
“야야, 괜찮아~ 연락 좀 해. 나 심심해 죽겠어. 원래 육아 때는 아기가 잠들어야 비로소 나의 삶이 시작되는 거야. 아기 재우고 집안일 끝내고 보통 밤 10~11시부터 내 시간이란 말이지. 히히. 아기는 미친 듯이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그렇다고 내가 매일 옹알이만 할 순 없잖아. 나도 말 좀 하고 살자. 남편은 오자마자 씻고 자기 바빠. 뭐 바쁘니까 이해는 가. 야, 그리고..”
수진이는 한 달은 대화를 굶은 사람처럼 자신의 일상을 마구마구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여 분을 수진이의 장단에 맞추던 나는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어 좀 미안했지만 그녀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수진아, 그런데 성수동 그 사람 어떻게 소개해준 거야? 기억 나?”
“아, 그 사람? 야야, 잘되가니? 히히~ 아, 그거 물어봤지. 내 정신 좀 봐. 나 대학교 때 친구들이랑 단톡방이 있거든 거기에 종종 연락하는 애들이 한 서른 명? 좀 넘게 같은 방에 있는데. 내가 너 솔로 됐다고 너 결혼시켜야 한다고 누구 소개 좀 해줘라~ 이렇게 올렸는데. 누가 ‘우리 학번에 00과에 재수하고 들어온 사람 있잖아, 그 사람도 솔로 된 지 반년이 넘었데.’라고 올린 거지. 난 딱 그것만 보고 그 과 동기 친구한테 부탁해서 소개해준 거야. 나도 그 사람은 얼굴만 아는데 굉장히 훈훈했거든. 호호”
‘단톡방..?!’
“수진아, 그럼 그거 알려준 사람 아직 그 단톡방에 있겠네?”
“그렇지, 그렇.. 겠지?”
“미안한데.. 그 방에 가서 그 사람 좀 찾아줄래? 내가..”
“오키. 그 정도야 뭐가 미안하니. 잠깐만~”
수진이는 잠시 단톡방을 확인하느라 조용해졌고 난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억겁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다. 어쩌면 승희의 자취를 여기서 발견할 수 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가슴의 심장 박동은 순식간에 몹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 찾았다! 아.. 어..? 야야, 그런데..”
수진이의 한 마디에 내 심장 박동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어 이어질 그녀의 말에 집중하며 지하철 플랫폼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리 단톡방에 그 메시지를 남긴 사람 말이야.. 지금은 우리 방에 없는 사람인가 봐. 지금 그 사람 상태가 ‘알 수 없음’으로 되어있어..”
난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에 어지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사람을 소개해준 사람이 지금은 그 단톡방에 없는 사람이라고 하니 오히려 그 사람이 승희일 것이라는 짐작은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승희는 왜 아무도 모르게 이런 일들을 준비한 걸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 모든 것을 준비해서 왜 굳이 나와 그 사람을 이어주려고 하는 걸까.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만 승희는 길지 않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친구다. 나의 친한 친구들 중 하나이기도 하고 친구들 무리와 관계없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사회생활을 할수록 좋은 사람을 더 만나기 힘든 걸로 보아하니 아마도 내 인생에 가장 좋아하고 배우고 싶은, 또 닮고 싶은 친구를 한 명만 꼽으라면 단연, 승희다. 그러고 보니 난 승희를 좋아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존경심, 경외심을 가질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까 제발, 이제는 좀 나타나길, 모습을 드러내길 바랐다.
그럼 그 사람은 왜..? 그 사람에게도 승희가 그 정도의 영향력과 친분을 가진 존재일까. 사실, 승희라면 어디를 가도 영향력과 존재감이 상당하기에 그 누구도 그녀를 쉬이 볼 수 없는 건 명확하다. 그 사람도 승희와 나만큼의 친분과 추억이 있다는 말인가. 지금 승희가 이 시점에 나와 그 사람을 만나게 한 데에는 필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닿자 난 당장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말에 만나기로 했지만 당장 내일 퇴근 후에 다시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잘 들어가셨죠? 친구한테 물어봤는데요. 단톡방의 그 사람.. 지금은 그 방과 그 메신저 자체에 없는 사람이래요.. 그래서 그런데 혹시 스케줄이 따로 없으시다면 저희 내일 퇴근 후에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너무 늦은 밤이었지만 집에 잘 들어왔다는 안부도 물을 겸 겸사겸사 메시지를 보냈다. 그 사람이 바쁘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잠시 답신은 금방 왔다.
“잘 들어가셨다니 다행이네요! 물론이죠. 저도 한창 궁금해하던 차였어요. 연락도 안 되는 애가 어떻게 제가 사는 곳 주소는 알아서 편지도 보내고.. 미스터리해요. 저도 승희를 너무 찾고 싶어요. 정말 똑똑하고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였거든요.”
‘편지..라고?’
승희의 편지, 나만 받은 게 아니었다. 이는 그녀가 정말 이 세상의 어딘가에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이제 1% 정도 남아있던 의구심은 99%의 확신에 더 해져 100%의 그리움이 되었다. 게다가 그 사람이 받은 편지의 내용도 무척 궁금해졌다.
승희는 도대체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혹시, 지금 나의 이런 반응도 이미 예상한 걸까. 승희가 어디선가 나의 이런 당황하면서도 설레는 모습을 보고 있다면 필시 입가에 매력적인 미소를 띠며 애정이 가득한 자애로운 눈빛을 보냈을 거다. 승희는, 그런 사랑스러운 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