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발견

by Rooney Kim


굳이 피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연히라도 마주쳐서 제 갈 길을 멈춘 채 안부를 물을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마음은 대부분 정리되었지만 물리적인 만남은 현실의 감각을 일깨워 불필요한 감정을 또다시 자아내기에 그런 필요치 않은 에너지 소모를 원치 않았던 속마음이 사실 내 진심이었다.


“얼굴이 더 좋아졌네. 다행이다. 하하하.”


원래 호탕했던 사람이지만 자신의 추종자 옆이라 그런지 더욱 신나 보였다. 그의 추종자는 나보다 예닐곱 살은 어려 보이는 앳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촐싹거리거나 알랑방귀를 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저 그와 나를 연신 번갈아보며 해맑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도무지 할 말이 없어 이만 자리를 뜨는 척하며 불필요한 감정 연료의 소진을 막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멀리서 그 사람이 후다닥 달려왔다. 막다른 곳에 갇혀 사생결단을 내릴 준비를 하다 구세주를 본 마냥 내 눈이 맑아졌다. 사람에게서 빛이난 다는 건 말로만 들었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오늘 그 빛을 보고야 말았다.


“헉헉, 죄송해요. 제가 식당 위치를 검색하다가 한 정거장을 더 가는 바람에..”


어쩜 늦은 이유도 이렇게나 합리적이고 납득이 갈까. 게다가 늦긴 했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와 주었기에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그 사람의 등장에 그와 그의 추종자는 이제 헐레벌떡 달려와 내 앞에 선 그 사람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의 놀람과 아주 조금의 당황함으로 가득 찬 그의 눈빛은 주도권을 빼앗긴 골목의 고양이 마냥 흔들렸다.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그와 함께하며 체득한 육감에 따르면 그는 크건 작건 무리의 규모를 떠나 주도권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그의 감정은 아무래도 좋다. 그가 당황을 하건 놀라건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 넷 사이에서늬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을지 여러 수를 생각하며 고민하는 눈빛은 이제 안중에도 없다. 그저 이렇게 달려와준 그 사람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직장 동료 분들이신가 봐요?”


숨을 급히 돌린 그 사람이 또 선 인사를 건넸다. 그의 표정은 이제 고민에서 당황으로 넘어가버렸다. 그의 추종자는 항상 당당하던 그의 모습만 보다 이런 모습은 처음인지 덩달아 어색한 모습을 연출했다. 저 멀리서 누가 이런 모습을 보고 있었다면 필시 연속극을 찍거나 시트콤을 찍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의 훌륭한 연기력들이었다.


“아뇨, 이 쪽은 제가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이고요. 이 분은, 아마도 이 분의 직장 동료이신 것 같아요. 여기서 기다리던 중에 우연히 마주쳤어요. 때마침 잘 오셨어요.”


그제야 그 사람은 나의 얼굴을 읽었다. 전 연인과의 우연한 마주침에 혹시 당황했는지 아니면 그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는지 나를 살피는듯 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는 여전히 어버버 거리며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이어나갈 물꼬를 찾는 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이제 이 사람과 함께 약속한 저녁을 먹으러 나갈 참이었다.


“그럼, 먼저 갈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며 자연스레 마주친 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결국 우리 넷의 짧은 만남에서 그는 단 한 번의 이야기 주도권을 쥐지 못한 채 그렇게 헤어졌다. 그의 추종자는 90도에 가깝게 허리를 접으며 인사를 했는데, 때문인지 생각보단 순진하고 사회 생활 매너는 갖춘듯 이미지가 달리 보였다. 돌아선 내 입가엔 살며시 미소가 돌았다. 이 미소는 당돌할 정도로 당당하던 그를 당황시킨 것에 대한 만족감 때문이 아니었다. 비로소 내가 정말 그를 마주하고 이렇게 보내버려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나 사소한 동요도 없다는 것에 대한 확인과 이런 발랄한 기분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보낼 사람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아, 그럼 제가 제때 맞춰 왔어야 했네요. 죄송해요. 저도 여기 굉장히 오랜만에 와서요..”


“전혀요. 너무 좋은 타이밍에 오셨어요. 덕분에 저도 난감한 상황을 잘 모면했네요.”


너무 오랜만에 맞이한 편안한 저녁이었다. 오월의 저녁은 어쩌면 지구 상에서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쾌적한 온도와 습도라고 할 정도로 훌륭했다. 밥을 내가 사니 커피는 또 굳이 그 사람이 사겠다고 했다. 오늘은 내가 모두 대접하는 날이니 즐기라고 해도 안된단다. 참,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커피는 얻어 마시기로 하고 규모는 작지만 조명 분위기가 좋은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는 마치 토굴을 파서 만든 것처럼 작은 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방되어있었지만 조명으로 공간감을 줘 굉장히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덕분에 마치 꿈속에 들어온듯한 몽환적인 기분마저 들었다.


우리는 사소한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으레, 소개팅이나 부자연스러운 만남을 하게 되면 서로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들로 뚝뚝 끊기는 대화를 하게 마련이다. 물론, 우리는 이미 몇 번의 만남을 가졌으니 조금 다르긴 하지만, 몇 번을 만나도 어색한 분위기로 인해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이 사람은 확실히 달랐다. 우리는 회사 이야기도 취미나 취향에 대한 이야기도 잘 맞았다. 몇몇 가지는 너무 똑같은 반응과 취향으로 놀랄 정도였다. 특히, 내가 승희와 함께 자주 얘기하던 삶에 대한 가치관, 삶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현상들에 대한 의견, 사물과 사람에 대한 조금은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이야기까지, 승희 이후로 이런 주제로 나와 이 정도로 오래도록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맞았다.


밤은 점점 깊어져 열 시가 다 되어갔다.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토록 즐겁고 깊이 있는 대화는 거의 십여 년 만에 처음이라 이 시간을 몇 분이라도 더 누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했다. 우리는 이제 몇 번 만났지만 어쩌면 이 사람과는 굉장히 오랫동안 이런 얘기를 나누며 지낼 수 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껏 환한 표정으로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꽃피우는 그의 얼굴을 보며 문득 승희가 떠올랐다. 세상의 걱정은 하나도 없는 듯한 티 없이 맑고 밝은 얼굴로 자신의 철학과 그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 유명한 소설가, 철학자의 이야기를 하며 내게 전해주던 지식의 샘이 이제는 이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한 감성에 젖어들었다.


“아 실은 제 예전 직장 동료 중에 승희라는 친구가 있었는데요. 승희가..”


난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서른이 된 내 인생에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그녀의 이름을, 겨우 몇 번 만난 것 외에는 아직은 잘 모르는 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을 것이라고는 전혀, 전. 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승희.. 라구요. 혹시 정승희는 아니죠..? 제 친구 중에도 승희가 있거든요. 정승희라고 저랑 같은 고향이고.. 하하.


사실, 승희라는 이름은 흔하다면 흔한 이름 중 하나라 설마 그 사람이 말한 승희가 내 친구 승희와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더 뜻밖이었다.


“정말 알아요? 승희를 요? 아.. 맞았구나. 어쩐지..”


난 그의 반응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쩐 지라니.. 어쩐 지라면 뭔가 나에 대해서 더 아는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했다.


“혹시 지금 승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우리 둘은 마치 짠 것 마냥 동시에 승희에 대해 물었고 똑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움과 동시에 더 깊은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하며 서로를 바라보며 둘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마냥 웃고 말았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violet

keyword
이전 03화당신은 미래에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