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미래에서 왔다

by Rooney Kim


“주말은 잘 보내셨어요? 저는 밀린 빨래랑 청소를 하느라 오후를 다 보냈더니.. 참, 저희 주중에 만나기로 한 거요.. 혹시 수요일은 어떠세요?”


오랫동안 평화롭게 그리고 이를 지지해주는 적당히 쾌적한 온도와 습도가 선물해준 아늑함에 둘러싸여 정신을 못 차리던 나는 별안간 울린 메시지에 다시 현실의 창을 휙 하고 열어젖혔다. 그 사람이었다. 반가웠다. 하지만 바로 답장을 할 순 없었다. 간밤에 마주한 추억들은 이제 현재의 기억이 되어 내 머릿속 구석구석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늦은 아침 이불속에 파묻힌 채 여전히 진한 그녀와의 기억 속에 침잠되어 묘하게 취한 기분의 수면 위로 굳이 고개를 내밀어 현실의 공기를 맡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밤에 맞이한 십여 년 전의 나 그리고 기억 속 승희와의 만남은 여전히 꿈처럼 느껴졌다. 이 여운은 어쩌면 괌에서 얻은 기억보다 더 오랫동안 나를 즐겁게 할 것 같다. 내 편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냉정한 세상 속에서 나를 이토록 명징하게 깨우는 단어들은 밤하늘, 학교 운동장, 일곱 개의 철봉, 여름의 대삼각형처럼 간단하고 오래된 것들이었다. 추억을 소환하는 것들은 대개 사소하거나 평범하다. 이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 그 사람과 함께 채운 이야기 그리고 이와 수반되어 이뤄진 먹고, 마시고, 걷고, 뛰고, 타고, 쉬었던 행위들이다. 특별한 시간과 사람이라는 건 따로 없다. 그저 지금 당신 곁에있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그들과 보내는 평범한 시간이 긴 세월 앞에 숙성되어 특별한 추억이 될 뿐이다.


이 여운은 이십 년이 넘게 내 방이었던 이 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곧 소파에 누워 TV나 만화책을 보며 보내던 방학으로 채워진 거실로, 매일같이 풍족하고 맛깔스러운 사랑으로 채워졌던 부엌으로 이어졌고 만사 궁금한 것, 고민이었던 것을 쏟아내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부드럽게 답해주셨던 아빠와, 나조차 모르는 이유로 저기압이 되어 입조차 떼지 않아 가족들을 답답하게 만들 때마다 집밥으로 그 속을 1초 내로 풀어주는 엄마로 연결되었다. 어릴 땐 매일 티격태격 내 말도 안 들었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선 항상 달려와줬던 동생이 떠오른 건 덤이다.


맞아. 내게 소중한 것은 나의 어린 시절 추억뿐만이 아니었다. 그 추억이 가능하도록 단단하고 안전한 나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부모님, 가족이 있었다. 내게 소중한 건 승희와의 밀도 있는 기억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갑자기 나의 모든 일상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십 년이 넘게 살았던 우리 집부터 수년 째 지내고 있는 나의 자취방까지 내 일상의 모든 면을 묵묵히 채워주는, 항상 그곳에 있는 것과 항상 나를 안아주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감사가 샘솟았다.


시간이 흘러 십여 년이 지나면 아마 이 순간들, 이 시간에 느낀 감정과 고민들은 그저 재미난 안주거리가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 시간들이 또 사무치게 그립지 않을까. 승희가 건네준 밤하늘의 기억으로 생각의 범위가 확장되자 내 감정의 센서도 십 수년의 시간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지금 한가롭게 누워있는 이 방, 아직도 애처럼 엄마에게 칭얼대며 밥을 차려달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밖으로 나가면 TV를 틀어놓고 한잠 주무시고 계실 것 같은 아빠 그리고 한심하게 게임이나 하고 있을 것 같은 동생. 게다가 한창 푸르러지고 있는 계절을 담은 거실 창 밖의 나무들까지.


'만약 내가 이 모든 사소한 일상의 평화를 사무치도록 그리워한 머나먼 미래에서 왔다면 지금 구름 같은 이불속에서 한가롭게 이런 몽상에 빠져있는 내가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 부럽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닿자 난 가만히 누워있을 수 없었다. 내 방 안의 모든 것들은 물론이요 집안의 가족들에게 뛰쳐나가 ‘너무 보고 싶었고 사랑한다’고 말을 해도 모자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 마음은 먼 미래에서 온 늙은 내가 다시 젊은 내가 되어 미치도록 그리워한 추억 속의 집을 여행하고 그 시절의 가족을 맞이하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이 기운으로 거실로 나갔다. 엄마와 아빠가 간식을 드시며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부모님을 안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수십 년 전에 내가 누리던 일상이었으니까. 이런 몽롱한 기쁨으로 가득찬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동생이 들어왔다.


“뭐하냐. 잠옷이 그게 뭐야. 그x야? 킬킬”


지난 과거의 재현이 너무 현실적이었을까? 괴랄한 웃음을 띠며 나를 놀리는 동생의 한 마디에 다시 현실로 강제 소환된 나는 아직도 이십대라 한없이 어리게 느껴지는 동생 녀석을 한심하게 쳐다보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른 서울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현실. 이 현실은 또 미래에 사무치게 아쉽고 그리운 추억이 될 테니 후회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버리자.’


난 얼른 그 사람에게 답장을 했다. 다음 주 수요일 퇴근 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최근엔 그에게서 오는 문자도 뜸해졌고 이젠 슬프고 지쳤던 마음도 많이 정리되었다.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건 당연히 승희 덕분이었다. 지친 일상을 벗어나 휴식과 위로가 필요했던 나의 현실은 요 몇 주 사이에 급격하게 변했다. 과거의 기억에서 치유받은 가슴은 곧 현실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고 이제 나의 하루하루는 어쩌면 먼 미래에 내가 그토록 그리워할 일상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단계까지 다다른 것이다.


수요일은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하루 종일 평소보다 더 부지런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하지만 꼭 이런 날이면 퇴근 한 시간 전에 어떤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부랴부랴 추가적인 업무도 마무리하고 퇴근 시간에서 십여 분이 조금 지난 후 퇴근을 했다. 생각보다 아주 조금 늦게 나왔지만. 완벽했다. 그 사람도 여기로 오는 길이라 십여분 뒤에 도착한다고 했다. 빌딩의 입구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볐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퇴근 시간도 사람들이 몰리는 잠깐을 제외하면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로비 구석의 벽에 기대어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고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들었는데 내 눈앞에는 그 사람이 아닌 헤어진 후에도 문자 메시지로 오래 질척인 그와 그를 추종하는 후배 직원이 묘한 웃음을 띠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vio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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