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읽은 난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부여잡았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전혀 예상 밖의 메시지를 받은 지금 도저히 가만히 자리에 앉은 채 좁디좁은 내 방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과의 집밥이었지만 어쩌면 서른 평생 살아온 내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 혹은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정답지를 한 번 펼쳐볼 수 있을 것 같은 기회 앞에서 부모님과의 식사는 내일 아침으로 슬쩍 미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넌 엄마가 꼭 저녁을 다 차려놓으면 그러더라. 안돼, 먹고 나가. 아니다. 이 야밤에 위험하게 어딜 나가겠다는 거니? 누군데?”
난 괌 여행 전, 승희의 첫 번째 편지부터 시작된 이 놀랍도록 신비스러운 여정에 대해서 가족에게까지 알려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슴이 조여질 정도로 반갑고 설레는 이 감정에 대해 구구절절 소상히 밝힐 걸 생각하니 더 머리가 아파왔다. 이는 친구들도 이해하기 힘든 이 환상적인 이벤트를 이제 60대 중반에 접어든 부모님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나의 편향된 사고에서 기인했지만 현실은 현실이니까.
어린 시절, 난 부모님께 무엇이든 물어보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라도 이해하고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은 훌쩍 커가는 동안 어느새 오랜 기간 동안 서로 공유하지 못한 관심사와 취향만큼이나 약해지고 멀어졌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 사이의 대화가 잦아들고 깊이가 얕아지면 서로에 대한 기대와 관심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물론, 천륜이라는 관계와 끈끈한 가족애는 그대로겠지만 일상의 웃음과 아픔에 대한 공유는 어쩌면 회사의 동료나 지인, 친한 친구들보다는 못하게 되어버리는 게 나이가 들수록 느낀 가족의 씁쓸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이건 서른이나 되었으니 발견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아직은 서른밖에 안된 좁은 식견으로 성급하게 결론 낸 소견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쉬움과 동시에 단절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건 사실이다. 그저 안타까운 건 어릴 땐 울고불고 내가 그렇게 찾던 엄마, 아빠인데 이제는 엄마와 아빠가 나를 찾는다는 점 그런데 난 기껏 한두 푼 더 벌겠다고 밤이고 낮이고 주말이고 내 일에 매몰되어 있거나, 조금이라도 짬이 날라치면 그동안 못 본 친구들이나 지인과 만나거나 자기 계발이랍시고 멀리 지방으로 가서 체험하고 교육받거나, 그렇게 하고도 시간이 남으면 그동안 반복된 일상에 지쳐 누적된 피로를 푼답시고 마사지를 받니, 사우나를 하니, 열 시간도 넘게 늘어지게 자는 둥 알게 모르게 엄마, 아빠를 멀리해왔다는 점이다. 그렇게 이십 대에서 삼십 대가 되어 깨달은 점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태도와 변명이 알고 보니 지극히 이기적이었고 논리적이지도 않았으며 어쩌면 불효라고 불릴 정도로 너무 무관심했었다는 사실이다.
아. 무. 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나가야 한다. 가슴속 깊은 곳에 꽁꽁 묶여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미지에 숨겨진 펄떡이는 감정들이 묶인 끈을 풀고 보자기에서 나와 마치 새싹이 땅을 뚫듯 부지런히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 감정에는 에너지가 있고 이 에너지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배는 고팠지만 힘이 넘쳤고 내 마음은 식욕 대신 모험욕으로 가득 찼다. 15~16세기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감정이 이러했다면 그들의 험난한 여정이 완전히 이해가 된다. 난 지금 지구는 둥글 것이라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떠나는 그들만큼이나 어쩌면 나의 마음도 둥글었다는 과거의 유하던 나를 찾기 위한 하룻밤 짧은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나갔다오게 내버려둬. 다 큰 성인이데 뭔 생각이 있겠지. 다녀와. 아빠는 엄마랑 밥 먹고 있을게.”
뜻밖이었다. 원래라면 엄마보다 아빠가 더 방방 뛰며 날 말렸는데 흔쾌히 나의 늦은 외출에 호의적인 아빠를 보니 고맙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난 엄마의 원성을 뒤로하고 밤길에 나섰다. 가로등이 밝은 길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녔지만 학교로 가는 길에 접어들자 그 수는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십여 년 만에 걷는 이 길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인근 초등학교 앞의 문방구가 그랬고 운동장의 낮은 담장에 걸쳐 길쭉하게 뻗은 담쟁이덩굴이 그랬으며 동네를 둘러싸고 길게 이어진 담벼락에 빛바래 낡은 벽화가 그랬다. 등굣길을 걷다 보니 난 어느새 십 년 전의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있었다. 수능이 세상의 전부였고 대학 진학은 마지막 숙제였다. 인생이 끝없는 숙제의 연속인지도 모르고 그저 그 계단만 올라서기에 급급했던 그 시절 천진했던 나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날 그렇게 웃게 만들었던 승희의 빛나는 눈동자가 마음속에 그려졌다.
드디어 정문에 도착했다. 학교는 여전했다. 건물 전체에 새롭게 페인트칠을 했는지 외관은 내가 다닐 때보다 깨끗해 보였다. 5층 건물보다 높게 자란 입구의 소나무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문을 지나 운동장으로 들어서자 깊고 진한 밤하늘이 널따랗게 펼쳐졌다. 높은 건물과 야간의 수많은 조명 때문에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자연스러운 밤하늘이었다. 불빛 하나 없이 오른편으로 길쭉하게 자리한 학교 건물도 이를 거들어주는 듯했다. 난 다시 승희의 편지를 꺼내 펼쳤다.
“세븐 바, 동쪽의 밤하늘. 이 시기의 학교 운동장은 우리가 꿈꾸던 대우주를 탐험하기에 딱 좋았어.”
세븐 바라면 ‘아, 운동장 끝에 일곱 개의 철봉이 있었지.’ 순간적으로 옛 기억이 떠올랐다. 승희와 난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 가끔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보곤 했었다. 승희도 나도 밤하늘과 별자리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우린 그런 점에서도 굉장히 잘 통했다. 세븐 바를 기억해 내고 나니 그다음 글들은 순식간에 해석되었다. 마냥 설레던 내 감정은 확신으로 변했다. 지금 이 시기의 동쪽의 밤하늘에는 우리 둘이 가장 좋아했던 별자리가 만들어지는 중이었던 것이다.
‘백조자리와 거문고자리.. 그리고 독수리자리가 만나 이루는 여름의 대삼각형, 승희는 내가 이걸 다시 보길 원했던 거야..!’
바로 이 자리, 승희와 내가 현실을 잊고 기분 좋게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즐기던 밤하늘의 별자리 쇼가 바로 여기서 지난 십 년 동안에도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서울에서도 볼 마음만 있다면 볼 수 있었지만 어느 곳에서나 쉽게 밤하늘을 즐길 순 없었다. 게다가 여름의 대삼각형을 보려면 외곽으로 나가야만 했다. 돌이켜보니 난 바쁘다는 핑계, 피곤하다는 변명, 다음에 가면 된다는 귀찮은 이유 같은 자잘한 현실의 낮은 굴레들조차 쉽사리 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까만 학교 운동장으로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수히 많았다. 쉴 틈 없이 반짝이는 수백만 개의 별을 한눈에 담자니 눈이 멀 것만 같아 기어이 두 눈을 꼭 감고 말았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이 슬쩍 불어 내 몸을 감싸 훌쩍 들어 올리더니 동쪽 밤하늘 여름의 대삼각형이 만들어지는 백조자리로 나를 올려 보냈다. 감은 두 눈앞에 펼쳐진 나의 유영은 곧 승희와의 기억을 소환했다. 우리는 별자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이야기의 끝은 꼭 이웃 학교의 멋진 학생들이나 등굣길에 그들과 눈이 마주쳐 어쩔 줄을 몰라하며 학교로 뛰어들어왔던 작은 에피소드들로 이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승희의 초대에 새삼 또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이윽고 두 눈은 촉촉하게 젖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의 추억은 알고 보니 잃어버린 게 아니라 내가 잊고 지냈을 뿐이었다. 나만큼이나 밤하늘을 좋아하고 드넓은 우주를 갈망했던 승희.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